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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다섯개 물고기 두 마리


(공현 후 화요일 복음 마르코 6,34-44)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화는 반드시 영안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냥 외적인 겉으로 드러난 일만을 바라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거나,
거부감이 느껴지거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군중이 배가 고픈데 당장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내지 말고 제자들에게 먹을 걸 주라고 합니다.
헌데 가진 건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으니,
제자들은 당황하게 마련인데
예수님은 그걸 들고 찬미를 드리고 떼어주기 시작하니
오천명의 군중이 다 먹게 되었다는<이 부분이 제일 황당합니다.> 이야기입니다.

이걸 일상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완전히 거짓말이지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라니요...
뻥을 치더라도 좀 될 법한 뻥을 쳐야 할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고,
더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은 그 실제 일어난 일(빵)에만 집중을 했으며,
더더우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사람들은 그 실제 일어난 일을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이 저마다 빵을 지니고 있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합리성'에 바탕한 이야기이지만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좋은 구실이지요.

이 일을 통해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바라셨을까요?
다음의 구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사람들이 알아서 스스로 먹기를 바랬습니다.
귀찮고 성가시고 능력도 되지 않는 일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를 바랬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는 불가능해보였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 비결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믿음)'과 '찬미(감사)'였습니다.
이 두 가지 줄기를 놓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보다 핵심적인 것은,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군중에게 먹이려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빵', 오늘날로 치면 재화에 해당하는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어떤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서 길을 걷게 하는 힘,
영적인 능력을 쏟아주고 싶어하셨고,
제자들은 이런 일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기를 바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미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로 미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똑같은 일을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룩한 제단에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제들은 제병과 포도주로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부족함을 느끼면서
신자들에게 은총을, 영적인 힘을 부어넣는 것입니다.

원래 사제들은 그런 일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추스리기에도 모자라고 기껏해야 가진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겨우 하루 버틸 정도의 식사거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예수님을 대리하여 그것을 제단 앞에 바치면서
하느님의 권능을 믿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순간,
그 부족한 영적 능력은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걸로 12광주리를 가득 채울 정도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신부님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사람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힘을 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 주셨고 그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선택하신 그분께서는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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