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FACEBOOK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는 점점 허물어져가고 있다.
지금의 어른들은 스마트폰을 쳐다보면서 길을 걸어가는 세대를 한탄스럽게 생각하지만
단순히 그런 양상을 단죄하고 말 일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고
아이들이 그러는 그 원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
어른 세대가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활동을 추구했고
오늘날의 이 세대는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로 그 영역을 찾아낸 것 뿐이다.
결국 바뀌어야 할 것은 도구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그 근본에 있다.

누구를 만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최신형 스마트폰을 쥐어준다고 해서
그가 그 스마트폰을 들여다볼리는 만무하다.
그에게 스마트폰은 그저 전화나 문자의 도구일 뿐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현 세대의 문제점은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것이다.
바로 눈 앞에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을 마주하고도
'소통의 부재'와 '외로움'을 느끼기에 오늘날의 세대들은 자꾸만 스마트폰을 훔쳐보는 것이다.

결국 현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는 상대를 찾아다니며
그 하나의 해소 방안으로 소셜 네트워크,
그 가운데 오늘날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페이스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문제는 스마트폰이나 소셜 네트워크 등등의 도구라는 껍데기가 아니라 그 뿌리에 있다.
사람을 만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도구를 줘도 만나지 못한다.
진솔한 관계 정립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페이스북을 통해서
나름 자신에게 특화된 공동체를 만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역시 본인 스스로의 착각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받아들여지게끔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좋은 신부님이나 수도자가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왜 그토록 외로워하는가?
가톨릭 사제로서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밑바탕을 받쳐주는 존재를 상실해 버렸다.
교회 안에서는 '하느님'이라 부르고
세상은 그를 '신', 혹은 '절대자'라 부른다.
우리는 이 존재를 상실해 버렸고
우리 스스로 존재의 바탕을 구축해야 하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들은
타인의 '인정'을 바탕으로 이 존재감을 구축하려 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홀로' 머무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곳에 홀로 외따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에 집중하는 세대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나 역시도 그 환자 중의 하나다.
그럴듯한 글을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자족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분이시라면 이제 앞으로
내가 올리는 글에 '좋아요'와 '댓글'을 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그저 글만 읽어주시길…
그러지 않으면 자꾸 은근히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게 된다.
그렇게 하다간 결국 여러분은 결국
사람의 반응에 환호하는 한 세속적인 사제만을 남겨두게 될 것이다.

부탁드리거니와
소위 말하는 '눈팅'만 해 주시길 바란다.
내가 자꾸 이 페이스북에 얽혀들고 있다는 게 느껴지면
불현듯 훌쩍 떠나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내 역마살은 유명하니까 ㅋ
오죽했으면 '볼리비아'까지 갔겠느냔 말이다. ㅎㅎㅎ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