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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이 해야 하는 일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2)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3)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4)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멀리 아프리카나 남미의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를 기억하고 돕자고 한국 교회에서 정한 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날만 되면 그저 막연히 2차 헌금을 낼 생각만 합니다. '돈 조금 더 내서 그거 모아다 주면 되지 내가 여기에서 뭘 더 어쩔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일까요? 오늘 복음의 '이사야서'의 구절을 함께 살펴보면서 진정한 원조의 의미를 상기했으면 좋겠습니다.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고급 요리집에서 거나하게 한 상 받아 먹을 걸, 집에서 초라하게 라면을 끓여 먹으면 그는 가난할까요? 성경에서 언급되는 '가난'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비워져 있는 상태가 가난한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의 외적인 면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심각하게 영적인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고급 요리집에서 수십만원짜리 점심을 한 끼 먹으면서도 집안 사람과 다퉈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사람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실제로 제가 사는 동네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면 아이들이 참으로 신기해하고 좋아하며 신부님 집에서 이런 동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진정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가난한 나라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마음이 풍요롭지 못한 모든 이들입니다. 결국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말은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2)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누가 잡혀갔습니까? 과거 사도들과 우리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잡혀 갔고, 일제 식민 시대의 우리 독립 투사들도 감옥에 끌려가 말도 못할 고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었습니다. 육체의 구속은 일시적입니다. 감옥 생활은 그 형량을 다하거나 우리의 목숨이 끝남과 동시에 절로 해방되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구속은 '영의 구속'입니다. 저는 한국에 나와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수감생활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돈'에, '재화를 향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로지 나누는 이야기라고는 모두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좀 더 돈을 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누구는 어떤 자리 누구는 또 어떤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며 이런 저런 물건들의 좋고 나쁨을 이야기하거나 이도 저도 할 이야기가 없으면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갇혀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은 심하게 갇혀 있었고 고통당하고 있었건만 사람들은 여전히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쓸데없는 활동들에 마음을 쏟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여러분들의 영이 세상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영에 빛을 주어 해방 시켜야 합니다.

3)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지금 미사에 참석한 우리 가운데 눈 먼 이는 없습니다. 모두가 밝게 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의 눈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출구가 어디 있는지 알고 미사가 끝나면 그리로 몰려갑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영적인 시야에서 모두 장님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사물만 볼 줄 알았지 내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길을 가다가 만난 거지에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넵니다. 이 장면을 외적으로 본 이들은 '아, 역시 저 부자는 자비로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부자의 내면에서는 '아, 다른 사람 눈총도 있고 어쩌겠니? 그리고 이 돈 지저분해서 어디 내기도 부끄러웠어 거지에게 줘버리지 뭐.'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다면 실제로 이 부자는 자선의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덕을 저지르는 셈이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눈멀었기 때문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 안에 커튼을 모조리 치고 불을 다 꺼 놓으면 내 눈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빛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영혼의 참된 빛,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성체입니다. 하지만 과연 몇명이나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그분의 몸을 제대로 모시고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4)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앞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과 같은 맥락인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앞서는 죄악에 빠져있는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되찾아오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선한 일을 하다가 억압을 받는 이들을 해방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태로든 억압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어둠으로 나아가는데 홀로 의로움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억압받게 마련입니다. 신앙인들이 흔히 가지게 되는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행복해져야 하는데 왜 나에겐 고통이 더 많이 밀려오는걸까?" 왜냐하면 오직 의로운 이의 고통만이 세상을 구원할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쓰레기를 버리고 치우지 않는다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은 다른 이가 그 쓰레기를 치워야 합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은 이의 노동,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유없는 고통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 가운데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짧은 생각과 시야로 그 의미를 당장에 분별해내지 못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십니다.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고 기꺼이 나에게 다가오는 시련을 견디고자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발걸음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해외 원조 주일'의 의미를 되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진정한 원조를 받아야 할 사람들, 영적 원조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부유하다고 생각하면서 도리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 것은 그 교회들이 성장해서 훗날 우리에게 영적인 조력자가 되게끔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과거 유럽 교회들이 아시아 교회를 열심히 돕다가 오늘날 도리어 아시아 교회로부터 영적인 힘을 얻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나라를 향한 우리의 도움은 '거지 적선'이 아니라 진정한 형제 교회의 생활을 돌보아 주는 사랑의 행위이어야 합니다. 훗날 여러분은 우리의 도움을 통해 성장한 남미 교회의 영적 보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난한 영혼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갇혀 있는 영혼을 해방시키며 영적인 눈을 뜨고 하느님을 일을 시작하면서 당하는 억압을 주님 앞애 봉헌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장 18-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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