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재화로 환산해 보려 하기 때문에
오늘의 이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굉장히 의아해합니다.
"아니 예수님 같은 분도 빈익빈 부익부의 마인드를 실천하는겐가?
가뜩이나 가진 사람이 더 많이 가져서 난리인데 예수님마저?"
돈을 좋아하면서 세상의 의로움을 추구하는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 보면 과연 그러합니다.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호사업은 대단해서 엄청난 자금을 모아들이고
그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고 물자를 사서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물자를 퍼다 나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입히고 먹이는 그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쳐 버리고 만다면
그 일은 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신앙인은 일반 자선 사업가와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는 '자선 사업가'가 아닙니다.
선교사는 '신앙의 선포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퍼다 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선교사는 불행합니다.
그는 열심히 그들의 외적 삶을 돌보면서 점점 더 그 일에 빠져들어 갈 것이고
결국 자신의 근본 방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수십년을 해외 오지의 선교지에서 일하면서 정작 자신이
왜 그러고 있어야 하는지를 상실하게 된 선교사가 있습니다.
또 반대로 단 한 번도 국내를 떠난 적이 없음에도
자신이 간직한 신앙의 보화를 널리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결과적으로 내어 주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지 '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실제의 옷을 주어 입히면서 실제로 신경써야 하는 것은
그들의 헐벗은 영혼입니다.
아마존 밀림에서 이미 발가벗은 채로 이미 적응하여 온전히 잘 지내는 원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양식의 수술이나 도시 문명인으로서 지낼만한 옷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참된 가치를 추구하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더욱 선하게 살게끔 도와주는 것이어야 했음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물건들을 전해주고 그들이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선교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이야기를 해서 우리는 이웃에게 무엇을 퍼다 주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가톨릭적 생활양식'이 아닙니다.
그것 이전에 본질적인 것이 있으니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레지오에 새 신자를 영입하는 것은
그 신자가 레지오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레지오 그룹의 명맥이 유지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새로운 예비자를 초대하는 이유는
그 예비자들이 보다 참된 길을 배우고 익혀서
그들 스스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가톨릭적인 새로운 생활양식'을 옷입히듯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눈에 우리의 신자로서의 삶의 양식은 호기심거리일 수 있고
첫 사탕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어느 신부님은 집에 초대된 신부님의 밥상에 올려져 있던 '김'이 먹고 싶어서 신부가 되었고
이러한 형태의 신앙으로 이끄는 세상적인 사물에 대한 첫번째 욕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다음 길',
즉 '신앙과 사랑'을 퍼다 주어야 하고,
퍼다 주는 만큼 받게 되며,
이 신앙과 사랑을 지닌 만큼 더 지니고
이 일을 소홀히 신경쓰지 않는 만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것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을까요?
하루 삼시 세끼를 무엇을 위해 먹으며
내가 하는 일의 근본 방향은 어디일까요?
스스로 고민하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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