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정결'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하지만 그 중의 적지않은 이들이 '성(性)'과 정결을 혼동하기 일쑤입니다.
물론 '성적인 정결', 즉 육체적인 정결이 존재하고 필요합니다.
혼전 순결이라든지 일부 일처제와 같은 교회의 교리는
그 본질적인 지향에 있어서 여전히 소중하고 '유효'합니다.
사제직을 지향하는 이들의 독신 서원이나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이들의 정결 허원 역시도
교회의 합당한 권위가 보존하고 있는 이상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릇되이 사로잡히기 시작한다면,
즉, 정결을 곧 육체적인 순결과 동일시하고
오로지 그 생각에만 사로잡한다면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성폭행을 당한 처녀는 폭력을 당한 감싸주어야 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
'정결'이 파괴된 부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그런 이들을 마치 '더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거짓 의로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나아가 하느님은 인간의 약점을 전혀 고려치 않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으로 내려오시어 인간의 나약함을 당신 스스로 체험하신 분이시기에
그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 의미에서 독신자들의 육체적 '성性적' 고민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더 잘 이해하고 보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정결은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정결은 내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합당한 것을 내어바칠 마음의 준비를 할 때에 참으로 정결한 사람이 됩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육신은 다른 나라에 있더라도 우리의 내면이 우리의 고향을 향해 있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고향에서 비롯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육신은 고향에 있어도
내 마음의 지향이 고향을 증오하고
오히려 어느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나는 결코 고향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혼인성사를 통해 하나된 부부는
하느님 안에서 정신적으로 육적으로 모두 결합되어 있어야 하기에
그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하고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이들 사이에는 하느님 아닌 그 어떤 제3자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제나 수도자 같이 '봉헌된' 생활을 하는 이들은
매 순간 자신의 온 존재를 하느님 앞에 내어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쓰러졌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좌절해 버리는 것은
도리어 하느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없고,
이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가진 그런 나약함으로 쓰러지고 그리고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을 체험할 때에
우리는 더욱더 큰 열정으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정결은 '내면의 방향'으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앞에 두고는
창녀와 세리들이 너희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가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흠도 티도 없이 맑고 정결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뿐입니다.
나머지는 주님의 은총을 입어 정화된 사람들 뿐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정결함을 유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은총이 가시는 순간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속적이고 불결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은총과 사랑을 받으며,
그를 통해서 참으로 '정결'한 사람이 되십시오.
신부님들,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들이 겪는 내면의 고민과 아픔이
여러분들을 참된 정결로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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