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경우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1)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2) 볼 수 있는 빛이 없을 때
3) 너무 익숙해져 버렸을 때
첫째로 우리가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장님들은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장님들, 영이 닫힌 이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주로 '죄에 빠진 이들'이고 눈 앞이 가리워진 이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무언가에 가리워져 있어서(주로는 죄책감, 또는 걱정이나 근심) 영이 드나들지 못합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손길, 즉 성사의 손길로 다시금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물을 구분해 낼 빛이 없을 때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시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빛이 없으면 사람은 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빛,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제 아무리 뛰어난 영적 분별력을 지니고 있어도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말씀의 빛,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셋째의 경우가 가장 지독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눈도 있고, 빛도 있는데, 그만 익숙해져 버린 경우입니다. 처음 길을 걸을 때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아름답게 다가와서 작은 풀꽃에게도 인사를 건네던 사람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려서 그저 다 안다고 생각해 버리고 안주하고 마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러한 이들이 바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모든 걸 다 알고 자기들이 모든 빛을 다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빛으로 오신 예수님,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익숙해짐'은 지금 교회 안에 잔뜩 퍼져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과 그 교회에 대해서 이미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겸손'은 점점 사라져가고 마음 속에 '교만'이 점점 쌓이게 됩니다. 이는 새로운 형태의 '눈 멂'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눈 앞에 무언가 가리워져 있어서 눈이 멀었다면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눈을 굳게 닫아버린 경우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새로이 눈 먼 상태를 본인 스스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이 보게 될 때의 그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고 이리 저리 부딪히다가 누군가 촛불을 들고 들어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러하니 세상은 길을 잃고 헤메이고 있는데 누군가 마음을 밝혀주는 촛불을 들고 들어오면 세상은 기뻐 뛰게 될 것입니다(물론 이 경우에도 눈이 열려 있던 이들만 기뻐하게 됩니다. 눈이 닫힌 이들은 촛불을 들고와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자, 이제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불을 당겨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이제 나아가 세상을 밝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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