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교사들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신화 쪽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 내며, 복음 선포자의 일을 하고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디모테오후서 4장 2-5절)
어떤 사람들은 '건전한 가르침 - 거룩한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떤'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러하고
때로는 나 역시도 그러하다.
왜냐면 '거룩한 말'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들음이 아닌 것이다.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듣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은 클래식 음악을 권하는 게 낫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서
쌍날칼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꿰찌른다.
그래서 듣는 이에 따라서 일종의 '불편함'을 양산하게 된다.
생각해보시라…
인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이제 인형을 그만 가지고 놀아라'라고 한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거룩함에 대한 우리의 거부 반응에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제 아무리 거룩하고 고상한 척 하더라도
결국엔 하느님과 줄다리기는 하는 중인 셈이다.
왜냐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남겨놓게 될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앞으로 나서는 데에는 걸림돌이 될 뿐이니까.
지금 여러분이 즐기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조만간 특별한 기회를 통해서
그것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거기에 푹 빠져서 그 쓴 맛을 보던지
아니면 그 전에 미리 더 좋은 것을
마음 절절이 깨달아서 그 방향으로 나서던지…
둘 다 장단이 있으니
전자는 일단 한 번 경험해 보았기에 다시 재발할 위험이 적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그쪽 어둠으로의 가능성의 영역은 더 크고
더 위험해질 수 있다.
후자는 미리 예방을 했으니 그 방향에 대해서 순수한 반면
다시 유혹이 찾아올 때에 올바른 대비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하느님께서는 마련해 두셨으니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느님에게 돌아서는 것 뿐이다.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자꾸 더 많은 영역들이 기회로 주어지는 느낌이다.
그만큼 위험성도 커지는 셈이랄까?
명예와 권력, 재화와 내 본성의 유혹들은
여전히 잠들지 않았다.
자칫 마음을 해이하게 지녔다간
당장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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