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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우는 교리 - 1.고해성사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언가에 대한 인식이 생겨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앙, 즉 믿는 행위에서도 마찬가지인지라 사람은 보고 들음을 통해서 자신의 '첫 신앙'을 형성해 나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이 믿을 바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첫 걸음을 잘못 걷게 되면 그릇된 길로 빠지기가 쉽상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인 '교리교육'을 통해서 첫 걸음마를 시작하는 이들의 길을 인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의 교리에 '군더더기'들이 많이 붙게 되고 실제로 신앙인들이 궁금해하는 바와 교회가 가르치려고 하는 바에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갓 구구단을 배우려는 아이에게 엄청 복잡한 공식을 알려주는 식이 되어 버렸고, 자연 신앙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은 그 어렵고 딱딱한 교리내용에 머리로는 무언가를 받아들이지만 마음은 이미 멀어져 있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 바로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인데, 교리를 배우면서 하느님을 저 하늘 높은 곳에 올려두고 나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시도이지만 신자분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교리교육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실제 신앙생활을 제대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20대의 청년이 일반적으로 가질만 한 궁금증에 대답해 나가면서 적지않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교리교육을 펼쳐볼 까 합니다. 오늘은 그 첫 궁금증입니다.

(다음에 서술될 사항은 가장 기초적인 교리적 상식을 바탕으로 한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내용들이 될 것입니다. 정통적인 교리상의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인터넷 상에 '가톨릭 사전'을 검색해 보시면 됩니다.)

1. 고해성사
- 옛날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소죄와 대죄를 알고 싶어요. 그리고 고해성사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날 모르겠어요. 자세히 말하면 신부님이 자세히 말하지 말라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너무 뭉뚱그려 말하면 또 뭐라하셔서 중도가 뭔지 모르겠어요.

고해성사는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수단입니다. 과거에는 지은 죄를 고백한다는 의미의 '고백성사'라는 표현을 주로 쓰다가 이 말마디 자체가 주는 중압감 때문인지 최근에는 묶여 있는 것을 풀어내는 '화해'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고해성사'라는 표현을 씁니다.

고해성사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핵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자칫 사로잡히기 쉬운 것이 세심증이거나 무뎌지는 양심이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이 고백이 하느님과 직접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어차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 덜 부담스럽고 좋을텐데 교회는 이 성사를 이루는 방법으로 교회의 성직자인 '사제'를 통해서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직접적으로 용서해 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적인 약점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확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 안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사제의 '사죄경'은 곧 하느님의 죄의 용서의 확실한 표지가 됩니다. 우리는 사제의 사죄경을 들음으로써 '죄를 용서받음'의 확실한 표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는 인간을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이 '화해의 성사'를 새로운 '재판의 장'으로 변모시키는 시도가 있습니다. 핵심은 '용서'인데 자신의 죄의 무겁고 가벼움에 민감한 신자들과 그것을 지나치게 분별하려는 사제 사이에 새로운 '재판'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제측에서는 이러한 고민이 다가옵니다. '지금 이 신자가 고해하는 이 죄를 지나치게 가벼이 다루어서 반복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죄의 정도를 분별하려고 마음을 쓰고 그에 맞추어 적절한 '보속'을 주는 데에 신경을 쓰다보면 어느새 하느님의 '용서의 도구'가 아니라 '심판관'이 되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신부님들, 고해성사의 핵심에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신자들의 죄를 우리 측에서 '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미약한 도구로서 그 신자들이 용서의 은총을 입고 기쁘고 행복하게 자신의 신앙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라는 핵심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곧잘 심판자가 되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도구들입니다.

다음으로 신자측입니다. 신자로서 고해성사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수치로 다가옵니다. '이런 죄를 고해하면 신부님이 이해하실까?' 또는 '이 죄는 너무나 심한 거라서 말하기 부끄럽다.'라는 생각으로 대충 얼버무리려는 마음과, 고해성사를 한 번 보고난 후 깨끗해진 마음에 아주 작은 허물도 너무나 크게 느끼고 다시 매번 마음을 씻어보려는 '세심증'의 두 가지 면모입니다.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과 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즈음에서 '대죄와 소죄'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는 대죄와 소죄가 분명합니다. 10원을 엄마 지갑에서 꺼낸 것과 1억원을 사장님의 지갑에서 꺼낸 건 분명히 다릅니다. 이러한 죄의 구분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윤리신학에서는 '대죄와 소죄' 나아가 '중죄'까지도 구분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죄는 똑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행위는 '죄'입니다. 심지어 의로워보이는 행위라도 그 안에 내포된 나의 마음이 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위한 노력이 되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죄를 합당하고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입니다. 우리 측에서 고해성사를 앞에 두고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을 하느님 앞에 솔직히 털어놓고 그분의 용서의 은총을 바라는 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교회는 죄가 되는 문제의 경중, 인식의 정도, 의지의 정도에 따라서 그 죄질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신자분들이 고해소에 들고오는 죄 가운데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어겨서 고해하러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느님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대죄중에 있는 이들은 고해소 근처에도 오지 않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에는 '내 죄가 얼마나 위중할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차라리 '내 마음 속에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얼마나 품고 있을까?'를 고민하십시오.

그러면 실천적으로 사제에게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까요? 고해소 안에서 실천적인 기본 틀은 '입장 - 성호경 - 마지막 고해 본 지 얼마나 지났는지 - 고백 - 신부님의 영적지도 및 보속 - 신부님의 사죄경 - 성호경 - 퇴장' 입니다. 구체적인 고해의 방법으로 '이렇다!'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너무 장황하지 않게 그리고 너무 생략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참으로 애매한 말입니다. 결국 구체적인 고해의 방법은 따로 없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다만 고해사제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은 신자 여러분들에게 있으니 자신의 고해를 참으로 잘 들어줄만한 사제를 잘 고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고해성사의 은총은 모든 이에게 똑같다는 사실도 절대로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영험한 신부님에게 성사를 본다고 죄가 더 잘 사해지고, 신경질적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라고 해서 죄가 덜 사해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솔직하게 고해소 안에서 털어놓은 죄는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모두 사해지게 됩니다.

신자분들에게 '보속'이라는 것이 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반드시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그 어떤 죄도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고, 그 죄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 앞에 우리가 합당하게 드릴만한 예물은 결코 따로 마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내려지는 그 어떤 보속도 실은 달게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보속은 우리의 죄의 댓가로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 주님의 피흘림을 통해서 이미 '공짜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결국 보속이라는 것은 다시 죄에 떨어지지 않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각 사제가 자신이 배운 신학적 지식과 고해 당시 고해자에 대한 분별을 통해서 가장 적절한 '보속'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사제가 지나친 보속을 주거나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못한 보속을 주어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도 보속이 새로운 죄의 근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보속을 실천하지 못할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지나치게 보속을 실천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부담감을 갖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번 고해 때에 그런 실제적인 사유를 설명하면 일반적으로 많은 신부님들은 그 상황을 이해하고 다음 보속을 경감해 주는 것이 보통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참에 행여 이 글을 읽게 되실 여러 젊은 신부님들에게도 부탁을 드리오니 우리가 보속을 많이 준다고 그 신자가 더욱 거룩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보속을 주었다고 그 신자가 미친 망아지처럼 그 죄에 더 쉽게 빠지지도 않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 신자가 고해성사의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행여 부족함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 양심에 따라서 고해성사를 대하는 신자분들에게 도움을 드리는 글을 적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면 기꺼이 댓글을 통해서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애정어린 충고를 기다리겠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한 보다 자세한 교리적 사항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하세요.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dic_view.asp?gubun=02&ctxtIdNum=5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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