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원조 주일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기본 '돈'과 '재화'를 떠올립니다.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 좀 퍼주지 뭐…"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2차 헌금 때에 돈을 좀 챙겨서 주고
그리고 곧 기억에서 잊혀져 버립니다.
진정한 '원조'라는 의미를 되새기고 싶습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그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지원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할머니에게 지팡이를 들어드린다고 하는 건
할머니를 돕는 게 아니라 할머니를 놀리는 꼴이 됩니다.
자칫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
가난한 나라들을 향한 '원조'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 속에 생각없이 돈을 마구 쥐어줍니다.
그러면 그러한 물질을 다루는 데에 익숙지 못한 이들이
도리어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갑니다.
전기도 없고 텔레비전이 아예 없는 공동체에서는
아이들이 참으로 순박하고 하느님을 경외할 줄 알지만,
전기가 들어오고 문명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도리어 하느님을 잊어갑니다.
'이걸 해 주면 될 거야'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과연 그들은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머무는 볼리비아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선배 사제들은 이들이 갖지 못한 물질적이고 외적인 부분을 참으로 많이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공소 건물을 지어주고, 교회 제도를 정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임이 되면서부터는 이미 어느정도 갖추어진 외견과 제도 속에서
사람들의 '영적 굶주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돈을 벌면 술을 끊고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전에는 소주를 마시다가 돈을 벌면서 고급 양주를 마시게 될 뿐입니다.
이런 이들을 진정으로 도와주는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고
보다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의미의 '도움'은 비단 가난한 나라에만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더욱 요청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참으로 많이 부유해졌고,
나아가서는 교만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과거 한국전쟁후의 비참한 삶 속에서도
참된 삶의 의미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이제 경제적으로 살만하다고 도리어 신앙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동등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을 마치 밀림 속의 원숭이처럼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제작년 휴가를 나와서 어느 거대한 본당에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열심히 내가 사랑하는 볼리비아 사람들에 대한 이런 저런 사연을 이야기하고는
이어 저녁 식사를 겸해서 사목 위원들과 자리가 이어졌습니다.
그 가진 자들의 거만스럽고 교만한 눈빛과 말투라니요…
그들은 내가 머무는 곳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지 참으로 궁금해 했습니다.
자신의 영혼의 열악함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가난한 백성에게 분명 돈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돈은 '거지 적선'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과 여러분 자신 모두에게 의미있는 진정한 '원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장 우선시 하셨던 것은
'빵을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내리는 것'이었음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이들은 모두 죽었지만,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한 이들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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