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배우고 철이 들고 약해지고 죽게된다.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철이 든 다음 찾아오는
'영적 성장'의 단계에 접어든 사람은
자연스레 자신이 지금은 어디쯤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정당한 호기심이고 필요한 호기심이다.
이미 거친 과정을 새삼스레 다시 거칠 필요가 없고,
때가 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명확한' 규정이 힘들게 느껴지는 건,
우리가 기계를 조립하듯이 그렇게 완벽하게 규정되는 존재들이 아니라는데서 기인한다.
하다못해 눈코입의 미묘한 위치에 따라서
누군가는 잘난 얼굴로 '교만'을 걱정해야 하고,
누군가는 못난 얼굴로 '자기비하'에 빠져들지 않을 고민을 해야 한다.
이는 마치 속도계, 거리계, 나침반이 달려있는 차량을 타고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무 무리하게 빨리 달리지 않도록 조심하기도 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거리를 왔는지도 봐야 하며,
무엇보다도 방향이 제대로 잡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영적인 단계들과 세상적인 여건들은
원래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세상적인 것들이 없이는 영적인 단계들로 이어질 발판이 사라지고,
또 반대로 영적인 것들이 없이는 세상적인 것들이 '허무'로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 둘을 잘 조화시켜야 하고,
그에 발맞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물건만 보면 갖고 싶어하는 소유욕에 사로잡혀 있다가
어느샌가 물건들이 그닥 끌리지 않는 시기가 찾아오면,
그만 안심해 버리고 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 때에는 이미 다른 단계, 혹은 다른 차원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질에서 어느정도 마음이 떨어지고 자유로워지면,
그 뒤에는 '자존심'이라든지 '명예', 누군가를 조정하고 싶은 '권력욕'의 차원이 다가올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새로운 걸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사춘기 소년 시기를 벗어난 사람이 그 시절의 설렘 같은 것에서는 자유로워 질 수 밖에 없다.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은,
그저 이쁜 소녀와 버스 옆자리에 앉기만 해도 쿵쾅거리던 가슴이,
이제는 무덤덤 하게 변해 버리는 걸 쉽지 않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이나 전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자, 각설하고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마음을 살펴보자.
하느님께서는 필요한 검색, 분별 도구들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
주님의 평화와 침묵 속에 머무는 사람은 충분히 스스로도 이 작업을 할 수 있다.
이 작업 가운데 우리가 가장 신경써야 할 것은,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을 비워내는 작업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턱대고 가서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아니다.
합당하게 준비되지 않은 고해는 오히려 마음을 찜찜하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대로 고해를 급하게 보지 않더라도
내면을 잘 정돈해서 방향을 올바로 세운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게 되고,
고해를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아니, 오히려 고해성사를 받으러 나아가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자, 다음부터 다음부터 하지말고,
지금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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