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이론’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엄연한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자신의 생활을 꾸려 나갔지요.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이론’들이 남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열매는 먹어도 되고, 이런 열매는 먹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워 나가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필요에 의해서 그러한 ‘지식’들을 남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는 그릇된 지식도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 지식들은 ‘수정’을 필요로 했고 조금씩 수정되어 나갔습니다.
교회 안에는 ‘신학 이론들’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론들,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들과 같은 온갖 것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사람들은 그 사랑을 돌려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했지요. 그리고 현실이 원래대로 존재할 때에는 이론이 따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론들’이 현실을 가로막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뭔가를 좀 할려고 하면 그게 이미 세워 둔 이론에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고 드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누군가가 배가 고파서 빵을 좀 달라는데 과연 그것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따지고 들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배고픈 사람은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현실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이론은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이론을 위해서 현실이 속박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채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가로막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지요. 이론은 실제 생활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실제 생활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끼리 살지 않는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현실을 잊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끼리 살아가는 세상이니 우리끼리 이론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우리끼리의 현실이 중요하니 우리끼리의 현실만 고려하자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언뜻 우리 입에 달콤한 이론들을 만들어냅니다. 처세술에 가까운 그 이론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에게로 이끌기는 커녕 도리어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은 거짓 학자들입니다. 하느님을 마음에 품지 않은 세상의 학자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신학 이론들’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론들,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들과 같은 온갖 것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현실’이 존재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사람들은 그 사랑을 돌려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했지요. 그리고 현실이 원래대로 존재할 때에는 이론이 따로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론들’이 현실을 가로막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뭔가를 좀 할려고 하면 그게 이미 세워 둔 이론에 맞는지 아닌지를 따지고 드는 지경에 이르렀지요. 누군가가 배가 고파서 빵을 좀 달라는데 과연 그것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따지고 들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그러다보니 배고픈 사람은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현실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이론은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이론을 위해서 현실이 속박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의 열쇠를 쥔 채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가로막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지요. 이론은 실제 생활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실제 생활을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끼리 살지 않는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현실을 잊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끼리 살아가는 세상이니 우리끼리 이론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우리끼리의 현실이 중요하니 우리끼리의 현실만 고려하자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언뜻 우리 입에 달콤한 이론들을 만들어냅니다. 처세술에 가까운 그 이론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에게로 이끌기는 커녕 도리어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들은 거짓 학자들입니다. 하느님을 마음에 품지 않은 세상의 학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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