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따지고 보면 예수님 이후 200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간들은 결국 일년, 또 일년이 흐르고 흘러 지나간 시간입니다. 그때의 사람들도 지금의 편의 시설과 문명적 조건이 없을 뿐, 같은 감정을 느끼고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기쁨과 슬픔, 걱정과 희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꾸려나간 셈이지요.
결국 다시 말하면 초대 교회 사람들이나 우리나 조건이 180도 뒤바뀐 건 없는 셈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오히려 더 나은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지금은 우리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길에서 외쳐도 지나가면서 빈정거릴 뿐 감옥에 집어 넣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길에서 외치진 마십시오. 하하.)
그럼 문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라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에 대한 불인식,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한 교만, 선포하는 자의 부족… 등등의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히 세례를 받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례를 받아도 하느님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문화적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취미생활의 하나로 신앙을 지닐 뿐 정말 하느님을 인지해서 신앙을 시작하는 게 아닌 셈이지요.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지만 자신이 이미 지닌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서 다가서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닌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맛에 빠져들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어찌보면 도전을 이겨내지를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주저하고 있는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될 수 있는 것은, 선포하는 자의 부족입니다.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어느 하나 누구가 가르쳐주지 않는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런 케이스는 실제로 일어나지만 때가 찰 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맡아서 책임 지실 것입니다. 예컨대 낙태된 영혼들과 같은 어린 아이들은 아예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영원의 섭리 안에서 그들을 합당하게 다루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티모 4,17)
결국 다시 말하면 초대 교회 사람들이나 우리나 조건이 180도 뒤바뀐 건 없는 셈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오히려 더 나은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지금은 우리가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길에서 외쳐도 지나가면서 빈정거릴 뿐 감옥에 집어 넣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길에서 외치진 마십시오. 하하.)
그럼 문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라는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주어졌는데 사람들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유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몇 가지로 추려볼 수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에 대한 불인식,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한 교만, 선포하는 자의 부족… 등등의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히 세례를 받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례를 받아도 하느님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문화적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취미생활의 하나로 신앙을 지닐 뿐 정말 하느님을 인지해서 신앙을 시작하는 게 아닌 셈이지요.
다른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지만 자신이 이미 지닌 것들을 포기하지 못해서 다가서지 못합니다. 자신이 지닌 돈과 권력과 명예의 달콤한 맛에 빠져들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는, 어찌보면 도전을 이겨내지를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주저하고 있는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경우가 될 수 있는 것은, 선포하는 자의 부족입니다.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어느 하나 누구가 가르쳐주지 않는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드문 케이스이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런 케이스는 실제로 일어나지만 때가 찰 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맡아서 책임 지실 것입니다. 예컨대 낙태된 영혼들과 같은 어린 아이들은 아예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영원의 섭리 안에서 그들을 합당하게 다루실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티모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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