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쓰러집니다. 쓰러지게 마련이고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쓰러져서 배운 것을 다시 반복해서 자꾸만 쓰러진다면 그것은 ‘게으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개선시킬 의지가 없는 게으름인 것이지요.
누군가를 신뢰했다가 뒷통수를 맞는 체험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걸 알고 다음부터는 사람을 만날 때에 검증을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고 다시 섣불리 마음을 주는 사람은 배울 능력이 없거나, 배워도 배운 것을 실천할 의욕이 없거나 하는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차라리 배울 능력이 없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건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깨닫고 나서도 그걸 실천할 의욕이 없는 상태라면 그건 문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힘들게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면 우리의 가르침은 그들 안에 도리어 ‘증오’와 ‘원한’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르침을 중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사람은 다시 크게 쓰러질 것이고 그때에야 배우게 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쓰러짐이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할 때에 이 사람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신뢰했다가 뒷통수를 맞는 체험을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걸 알고 다음부터는 사람을 만날 때에 검증을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고 다시 섣불리 마음을 주는 사람은 배울 능력이 없거나, 배워도 배운 것을 실천할 의욕이 없거나 하는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차라리 배울 능력이 없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그건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깨닫고 나서도 그걸 실천할 의욕이 없는 상태라면 그건 문제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힘들게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면 우리의 가르침은 그들 안에 도리어 ‘증오’와 ‘원한’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르침을 중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 사람은 다시 크게 쓰러질 것이고 그때에야 배우게 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쓰러짐이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할 때에 이 사람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