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어린 시절 저는 큰외삼촌의 장난감을 기억합니다. 제 외갓집은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였습니다. 저는 구미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외삼촌이 집에 방문을 하면서 선물을 가져 오셨습니다. 당시 프라모델이 한참 성행했는데 외삼촌이 저에게 프라모델 로봇 장난감을 사들고 오신 겁니다. 그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나이 서른 중반에 아직도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외삼촌이 가져온 것은 프라모델이었지만, 실제로는 저에게 ‘기쁨’을 선물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쁨은 아주 작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사실 어른들에게 프라모델 장난감은 얼마 하지 않는 것이지만 외삼촌은 집을 방문하면서 조카인 저를 기억했고 장난감을 사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기쁨을 선물하셨지요.
우리가 이웃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가장 겉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이미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뭔가 큼지막한 선물을 받으면 받았다고 느끼고 그게 아니면 별달리 받은 게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웃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최고의 것은 단연코 ‘신앙’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가 쓰면 사라지는 것들이지만, 신앙은 우리 안에서 기쁨의 샘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전해 듣는 소식은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신앙이 제도화되고 삶의 옵션처럼 치부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선교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선교를 하는 것이 커피 한 잔을 권하는 식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좋아하면 마시지만 싫어하면 억지로 권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본인 자신에게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신앙’이 커피 한 잔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언제라도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 내던질 수 있는 세상의 수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것은 그러한 성질의 것일까요? 하나의 옵션일 뿐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근본의 선택입니다. 이미 마련된 영원의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의 인간의 자유의지는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잔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하지만 본인이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이 잔치에 초대하는 일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는 없는 셈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초대는 퍼져 나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적어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은 본인 스스로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참된 소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의 예쁘장한 성당과 전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기쁨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교’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로마 10,16-18)
어린 시절 저는 큰외삼촌의 장난감을 기억합니다. 제 외갓집은 초등학교 앞의 문방구였습니다. 저는 구미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외삼촌이 집에 방문을 하면서 선물을 가져 오셨습니다. 당시 프라모델이 한참 성행했는데 외삼촌이 저에게 프라모델 로봇 장난감을 사들고 오신 겁니다. 그때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나이 서른 중반에 아직도 장난감을 좋아합니다.
외삼촌이 가져온 것은 프라모델이었지만, 실제로는 저에게 ‘기쁨’을 선물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쁨은 아주 작은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사실 어른들에게 프라모델 장난감은 얼마 하지 않는 것이지만 외삼촌은 집을 방문하면서 조카인 저를 기억했고 장난감을 사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기쁨을 선물하셨지요.
우리가 이웃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것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가장 겉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이미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뭔가 큼지막한 선물을 받으면 받았다고 느끼고 그게 아니면 별달리 받은 게 없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웃들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는 것들 중에 가장 최고의 것은 단연코 ‘신앙’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가 쓰면 사라지는 것들이지만, 신앙은 우리 안에서 기쁨의 샘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전해 듣는 소식은 그래서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신앙이 제도화되고 삶의 옵션처럼 치부되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선교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선교를 하는 것이 커피 한 잔을 권하는 식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좋아하면 마시지만 싫어하면 억지로 권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본인 자신에게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신앙’이 커피 한 잔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언제라도 세상의 가치를 위해서 내던질 수 있는 세상의 수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것은 그러한 성질의 것일까요? 하나의 옵션일 뿐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근본의 선택입니다. 이미 마련된 영원의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의 인간의 자유의지는 끝까지 살아남아 우리의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잔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하지만 본인이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이 잔치에 초대하는 일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수는 없는 셈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초대는 퍼져 나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소리를 적어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은 본인 스스로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참된 소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톨릭의 예쁘장한 성당과 전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기쁨을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교’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로마 1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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