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은 유행처럼 가난을 말하고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가난’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아니, 달리 표현하면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던 것들은 유지하면서 가난한 자를 돌보려니 결국 쉬운 방법은 자신보다 더 부유한 자들을 비난하는 방법 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위선적 이론가’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가난을 말로만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이지요. 가난해보지 않고 부족해 보지 않은 그들은 화려함에 둘러싸여 살면서 가난을 강조하고 극심한 부유함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들입니다.
저는 남미의 가난한 나라인 볼리비아에서도 시내를 벗어난 변두리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적인 가난 안에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저는 두 눈으로 똑똑히 그들의 가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칩니다. 어느 가난한 할머니는 나에게 오늘 낳은 달걀을 들고 오고, 얼마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어느 가난한 할아버지는 성당에 나와서 내 강론을 듣고 미사를 마치면 내 손을 꼭 부여잡고 등을 두드려 줍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가난에 대해서 강조하며 도리어 가난을 이용하는 이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가난을 강조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정말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모습보다는 ‘모든 권위의 파괴’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지금 교회의 제도화되고 권력을 갖추고 부유한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미 교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한국 교회의 중산층화를 넘어선 부유층화는 사실 누가 보더라도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가난을 두려워하면서 유행에 편승하게 될는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더러운 그릇에 파리가 날라 다니는 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식사를 하는 걸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권리 옹호에 대해서 강조하고, 또 정작 우리가 가진 이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가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마치 율법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그 핵심의 예수님을 무시하는 바리사이들과 마찬가지 일을 하는 셈입니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셈이지요. NIMBY(Not in my back yard) 현상일 뿐입니다. 내 뒷뜰만 아니면 가난한 이가 고통받든, 상급 교회가 고통받든 괜찮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할만한 범위에서 모든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짐을 지는 사람’이 참으로 필요한 오늘날입니다. 어느 순간 다시 다가올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실제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큰 규모의 일들은 실제로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됩니다. 실제로 명절마다 고통 당하고 있는 아내를 위해서 따뜻한 위로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뭔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기보다는 뭔가 그에게 다가오는 세상적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을 보란듯이 SNS에 올리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보아 주기를 바라겠지요. 하지만 정작 집에서 아내가 몰래 흘리는 눈물은 볼 줄 모르는 장님일 뿐입니다.
주임으로 일하는지 3년이 지났지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같이 밥을 먹다가도 보좌 신부보다 먼저 쫓아나가는 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크고 대단한 일을 맡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매 순간의 헌신을 기다리시지요. 정말 우리가 헌신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올바로 살피지 않고 실제로 거기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행이 지나고 나면 잊혀져 버릴 공연한 말잔치의 객원이 될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SNS시대의 어쩌면 크나큰 폐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제 위치를 잊지 않고 선교 지역의 본당 신부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자리에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내와 자녀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만한 일을 시작하십시오.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위선적 이론가’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가난을 말로만 가르치려드는 사람들이지요. 가난해보지 않고 부족해 보지 않은 그들은 화려함에 둘러싸여 살면서 가난을 강조하고 극심한 부유함을 비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이들입니다.
저는 남미의 가난한 나라인 볼리비아에서도 시내를 벗어난 변두리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적인 가난 안에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저는 두 눈으로 똑똑히 그들의 가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칩니다. 어느 가난한 할머니는 나에게 오늘 낳은 달걀을 들고 오고, 얼마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어느 가난한 할아버지는 성당에 나와서 내 강론을 듣고 미사를 마치면 내 손을 꼭 부여잡고 등을 두드려 줍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가난에 대해서 강조하며 도리어 가난을 이용하는 이들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가난을 강조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정말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모습보다는 ‘모든 권위의 파괴’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지금 교회의 제도화되고 권력을 갖추고 부유한 모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남미 교회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한국 교회의 중산층화를 넘어선 부유층화는 사실 누가 보더라도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가난을 두려워하면서 유행에 편승하게 될는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더러운 그릇에 파리가 날라 다니는 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식사를 하는 걸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권리 옹호에 대해서 강조하고, 또 정작 우리가 가진 이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회가 모든 것을 내려 놓으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마치 율법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그 핵심의 예수님을 무시하는 바리사이들과 마찬가지 일을 하는 셈입니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셈이지요. NIMBY(Not in my back yard) 현상일 뿐입니다. 내 뒷뜰만 아니면 가난한 이가 고통받든, 상급 교회가 고통받든 괜찮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이 할만한 범위에서 모든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짐을 지는 사람’이 참으로 필요한 오늘날입니다. 어느 순간 다시 다가올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실제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큰 규모의 일들은 실제로는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됩니다. 실제로 명절마다 고통 당하고 있는 아내를 위해서 따뜻한 위로 한마디 건넬 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뭔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기보다는 뭔가 그에게 다가오는 세상적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행동을 보란듯이 SNS에 올리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보아 주기를 바라겠지요. 하지만 정작 집에서 아내가 몰래 흘리는 눈물은 볼 줄 모르는 장님일 뿐입니다.
주임으로 일하는지 3년이 지났지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같이 밥을 먹다가도 보좌 신부보다 먼저 쫓아나가는 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크고 대단한 일을 맡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매 순간의 헌신을 기다리시지요. 정말 우리가 헌신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올바로 살피지 않고 실제로 거기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행이 지나고 나면 잊혀져 버릴 공연한 말잔치의 객원이 될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SNS시대의 어쩌면 크나큰 폐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제 위치를 잊지 않고 선교 지역의 본당 신부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자리에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과 아내와 자녀로서,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만한 일을 시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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