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티아 5,6)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핵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정 의로운 이들이 되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말 가까이에 가장 중요한 것을 두고 전혀 엉뚱한 데에서 그것을 찾곤 합니다.
주교님을 만나면 대단하고 일개 신부를 만나면 아무것도 아니고, 수도자는 평신도보다 상위의 사람이고… 이런 생각들의 출처는 바로 우리를 끈질기게 잡아끄는 율법의 유혹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전례를 거행하고 신앙 공동체를 사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더 나은 ‘등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자도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기도에 헌신하고 생활 자체를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할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유다인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품이 중요하고 서품받지 않으면 별볼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사제가 늘 술에 쩔어 살고 도박이나 한다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는 평신도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평신도가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고 가정의 신앙적 기둥이 된다면 그는 여느 땡수도자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유유상종이라고 고위 성직자, 수도자와 관계 맺기를 좋아하는 평신도가 또 그런 생각을 가진 성직자를 만들어내고, 그런 수도자를 만들어냅니다. 즉, 그런 직분을 ‘즐기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만들어내지요.
공동체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평신도들만 모여 있는데 거기에 전혀 엉뚱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올리가 없고, 거룩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머무르고 있는 데에서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갖는 평신도가 활개를 치고 다닐 일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공동체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모인 결과물인 셈이지요.
누구 탓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말뿐인 믿음, 행동 없는 사랑, 사랑과 믿음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요?
누구든 빛을 지니고 있으면 그것을 등잔대에 놓게 마련입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닌 빛은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셈이지요.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핵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진정 의로운 이들이 되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정말 가까이에 가장 중요한 것을 두고 전혀 엉뚱한 데에서 그것을 찾곤 합니다.
주교님을 만나면 대단하고 일개 신부를 만나면 아무것도 아니고, 수도자는 평신도보다 상위의 사람이고… 이런 생각들의 출처는 바로 우리를 끈질기게 잡아끄는 율법의 유혹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전례를 거행하고 신앙 공동체를 사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더 나은 ‘등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자도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기도에 헌신하고 생활 자체를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할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유다인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품이 중요하고 서품받지 않으면 별볼일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극단적인 예로, 사제가 늘 술에 쩔어 살고 도박이나 한다면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는 평신도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평신도가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고 가정의 신앙적 기둥이 된다면 그는 여느 땡수도자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유유상종이라고 고위 성직자, 수도자와 관계 맺기를 좋아하는 평신도가 또 그런 생각을 가진 성직자를 만들어내고, 그런 수도자를 만들어냅니다. 즉, 그런 직분을 ‘즐기는’ 성직자와 수도자를 만들어내지요.
공동체는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평신도들만 모여 있는데 거기에 전혀 엉뚱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올리가 없고, 거룩한 성직자와 수도자가 머무르고 있는 데에서 엉뚱한 일에 관심을 갖는 평신도가 활개를 치고 다닐 일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공동체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모인 결과물인 셈이지요.
누구 탓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말뿐인 믿음, 행동 없는 사랑, 사랑과 믿음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요?
누구든 빛을 지니고 있으면 그것을 등잔대에 놓게 마련입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닌 빛은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는 셈이지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