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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메뉴얼

보좌 신부 시절, 아직 본당에 발령받기 전에 우리 사제들은 ‘가두선교’라는 것을 나가야 했습니다. 몇 시간의 교육을 받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선교 책자를 주고 인적사항을 받아오는 것이었지요.

솔직히 어색하고 싫었습니다. 하지만 ‘선교’라고 하고 우리 신앙인의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한 셈이지요.

지금은 진짜배기 선교를 나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건 선교가 아니다라고 할 수 없는 외적 형태의 선교를 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제는 말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이지요.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요. 가두 선교도 좋은 복음 선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치 그것을 선교의 핵심인양 간주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후속 작업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본당들이 ‘선교’를 한다면서 ‘행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한 때의 유행처럼 훅 사람을 끌어모은 뒤에는 장기적으로 사람들이 떠나가게 되지요. 그리고서는 몇 명 남은 사람을 두고 그래도 몇 명 건졌다고 안심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정말 다양할 수 있습니다. 친구와 술을 한 잔 하면서도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 선교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참된 선교가 아니라면 전국 단위의 선교 운동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행사’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선교의 본질은 ‘닮아가기’라고 하는 게 적당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닮아가고 그들은 우리를 닮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이라고 갖다 쑤셔넣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닮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그들도 우리를 닮아가야 합니다. 무조건 그들에게 속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도 우리가 가진 핵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다가와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이 두 작업은 굉장히 미묘하고 섬세한 작업입니다. 지나치게 그들에게 동화하려는 시도에만 열중하다가 정작 본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또 반대로 지나치게 그들을 끌어 당기려다가 그들이 의욕을 상실하게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소위 말하는 ‘밀당’을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기술’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우리 신앙의 문제이지요. 아무리 선교의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내면 한가득 신앙을 품고 있는 사람을 당해내진 못합니다. 선교 자체가 우리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까요.

선교 메뉴얼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진정한 선교 메뉴얼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입니다. 거기에 모든 답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최고로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실패하게 됩니다. 모래 위에 쌓은 집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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