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연차는 중요합니다. 선교지에 금방 오자마자, 아니면 오기도 전에 책으로 선교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선교에 대한 내용을 읽어도 막상 직접 체험해 보면 개개인마다 전혀 다른 책이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교의 열정도 중요합니다. 선교의 연차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열정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려는 열정이 없다면 그저 공연한 시간만 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물은 확연히 다릅니다.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선교사와 짧지만 굵게 살아가는 선교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동화되지 않으면 도리어 어두움만 늘어가기도 하지요. 선교지의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면서 미개인 취급하고 여전히 자신의 본국의 화려함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는 10년을 선교하든, 20년을 선교하든 전혀 바뀌는 게 없는 셈입니다.
반대로 열과 성을 다해서 살아가는 선교사는 물론 절대적인 기본 적응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그 이후의 진보의 과정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때로 남미에 살았다고 남미를 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교만한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들은 편안한 곳에서 지내면서 이런 저런 ‘데이터’로 남미를 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경력만 느껴질 뿐, 향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비판할 때에는,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없는 비판은 ‘칼’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저도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에 대해서 잘 안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정말 ‘잘 아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통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게 마련입니다. 과학자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지혜로운 이들은 이제 겨우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선교의 열정도 중요합니다. 선교의 연차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열정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려는 열정이 없다면 그저 공연한 시간만 보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물은 확연히 다릅니다.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선교사와 짧지만 굵게 살아가는 선교사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동화되지 않으면 도리어 어두움만 늘어가기도 하지요. 선교지의 사람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면서 미개인 취급하고 여전히 자신의 본국의 화려함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는 10년을 선교하든, 20년을 선교하든 전혀 바뀌는 게 없는 셈입니다.
반대로 열과 성을 다해서 살아가는 선교사는 물론 절대적인 기본 적응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그 이후의 진보의 과정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때로 남미에 살았다고 남미를 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교만한 사람이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들은 편안한 곳에서 지내면서 이런 저런 ‘데이터’로 남미를 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경력만 느껴질 뿐, 향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비판할 때에는,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없는 비판은 ‘칼’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저도 사람입니다.’라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에 대해서 잘 안다고 공언하는 사람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정말 ‘잘 아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통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이게 마련입니다. 과학자들 중에서도 진정으로 지혜로운 이들은 이제 겨우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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