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사람들은 교회에 화가 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의 부유함, 성직자의 외통수, 굳건한 제도… 아주 단골로 까이는 것들이지요.
교회의 부유함(물질만능주의)
사실 교회는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핵심이 아니지요. 바오로 사도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살 수 있었던 분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미국에도 성당은 있고 아프리카에도 성당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자신의 본질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정도로 재산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이는 필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교회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으로 화려하다고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그 화려함이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화려함입니다. 성시간을 하는데 좀 더 아름답게 꾸며서 아직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외적인 화려함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필요한 일이지요. 사람들이 모두 신심이 늘어나고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린다면 교회는 가난할래야 가난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핵심을 잃어버린 화려함, 즉 물질만이 우선시되는 가운데에 외적 부유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외통수(성령이 없는 독선과 교만)
교회는 분명히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독재체제도 아니지요.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을 받은 이들이 이끌어가는 공동체,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 지상의 공동체입니다. 성직자가 정말 하느님의 영에 감싸져 있더라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의 영을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영을 잃은 채로 홀로 교만과 아집에 싸여가는 사제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올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성직자가 외통수라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쵸컬릿을 한 상자를 먹고 싶은 아이가 건강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제도(율법주의)
신경써야 할 것이 늘다보면 그에 합당한 제도가 생겨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이들 한 서너명을 데리고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과 수천명이 있는 대학을 운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는 영원히 초대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 시대에 합당한 모양새를 갖춰 나간 셈입니다. 모든 제도를 그 자체로 악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제도에 사로잡혀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을 가로막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12사도단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일대 다수로 복음을 선포한 게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 안에서 꾸준히 성장하는 중이지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굳어버린 조직, 피가 통하지 않는 조직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 안에는 때로 피가 통하지 않아 죽어가는 공동체가 있고 그에 따라 신자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지요. 이 부분을 치유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지 못한 모습에 대한 비판은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비판하는지는 알고 할 필요도 있습니다. 막연히 교회의 궁색함을 찬양하거나, 성직자의 합당한 권위 마저도 무시하거나, 필요하고 정당한 제도 마저도 없애려 한다면 곤란합니다.
교회의 부유함(물질만능주의)
사실 교회는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핵심이 아니지요. 바오로 사도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살 수 있었던 분입니다. 지금의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미국에도 성당은 있고 아프리카에도 성당은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자신의 본질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정도로 재산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다면 이는 필히 잘못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교회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외적으로 화려하다고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 그 화려함이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화려함입니다. 성시간을 하는데 좀 더 아름답게 꾸며서 아직 눈에 보이는 것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외적인 화려함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필요한 일이지요. 사람들이 모두 신심이 늘어나고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드린다면 교회는 가난할래야 가난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핵심을 잃어버린 화려함, 즉 물질만이 우선시되는 가운데에 외적 부유함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외통수(성령이 없는 독선과 교만)
교회는 분명히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독재체제도 아니지요.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을 받은 이들이 이끌어가는 공동체,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 지상의 공동체입니다. 성직자가 정말 하느님의 영에 감싸져 있더라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난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하느님의 영을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영을 잃은 채로 홀로 교만과 아집에 싸여가는 사제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올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성직자가 외통수라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쵸컬릿을 한 상자를 먹고 싶은 아이가 건강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제도(율법주의)
신경써야 할 것이 늘다보면 그에 합당한 제도가 생겨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결과입니다. 아이들 한 서너명을 데리고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과 수천명이 있는 대학을 운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교회는 영원히 초대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 시대에 합당한 모양새를 갖춰 나간 셈입니다. 모든 제도를 그 자체로 악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제도에 사로잡혀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을 가로막을 때 일어나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12사도단이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그저 모든 사람에게 일대 다수로 복음을 선포한 게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 안에서 꾸준히 성장하는 중이지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굳어버린 조직, 피가 통하지 않는 조직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교회 안에는 때로 피가 통하지 않아 죽어가는 공동체가 있고 그에 따라 신자들이 신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하지요. 이 부분을 치유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지 못한 모습에 대한 비판은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비판하는지는 알고 할 필요도 있습니다. 막연히 교회의 궁색함을 찬양하거나, 성직자의 합당한 권위 마저도 무시하거나, 필요하고 정당한 제도 마저도 없애려 한다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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