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자유’라는 것은 소중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가솔린 통을 들고 불로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그에게 느긋하게 다가가서 아이에게 ‘이 행동을 할 것이니?’라고 묻지는 않습니다. ‘예방 접종은 맞고 싶니?’라고 묻지도 않지요. 그 순간 아이의 의사는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아이가 죽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것들이니까요.
과연 우리는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일까요?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걸 다루는 걸까요? 아니면 일단은 받아들이고 난 뒤에 그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일단 아이가 죽을 위험이 없고 나면 운동을 더 해서 건강해지던지 말던지 하는 것은 본인의 추가적인 선택에 맡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유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셈이지요.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방향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양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무책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똑똑하다는 이들부터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일을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겠다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교의 의무를 소홀히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앙이 실제로는 ‘공허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스스로부터 영원에 기틀을 세우지 않고 공허한 모래밭에 나무 조각을 하나 얹어 놓은 셈이지요. 그러니 그걸 남에게 전하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 신앙의 긴박감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이 세대’에 대한 한탄은 오늘날 누그러졌을까요? 아니면 도리어 더 긴박해졌을까요?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을수록 실제적인 긴박감은 더 가중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눈이 흐려져 버린 이들이 사물을 더 명확하게 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헛된 희망인지도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일까요?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걸 다루는 걸까요? 아니면 일단은 받아들이고 난 뒤에 그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일단 아이가 죽을 위험이 없고 나면 운동을 더 해서 건강해지던지 말던지 하는 것은 본인의 추가적인 선택에 맡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이 사라지고 나면 그 자유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셈이지요.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방향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양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양보가 아니라 무책임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소위 똑똑하다는 이들부터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일을 스스로의 선택에 맡기겠다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교의 의무를 소홀히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앙이 실제로는 ‘공허한 신앙’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스스로부터 영원에 기틀을 세우지 않고 공허한 모래밭에 나무 조각을 하나 얹어 놓은 셈이지요. 그러니 그걸 남에게 전하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 신앙의 긴박감의 정도는 어느 정도일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하신 ‘이 세대’에 대한 한탄은 오늘날 누그러졌을까요? 아니면 도리어 더 긴박해졌을까요?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 자체가 없을수록 실제적인 긴박감은 더 가중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눈이 흐려져 버린 이들이 사물을 더 명확하게 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헛된 희망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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