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력이 조금만 뛰어나다면 숟가락 하나로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숟가락은 뭔가를 퍼는 곳이 있고, 손잡이가 있습니다. 포크로는 국물을 떠먹을 수 없지요. 뭔가를 퍼기 위해서는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부분이 필요한 셈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지요. 영적인 보화를 길어내려면 영적인 보화를 퍼내는 우리의 관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심으로 영적인 보화를 퍼내려고 한다면 포크로 국물을 떠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모아서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지요. 숟가락에는 손잡이가 있습니다. 숟가락은 손잡이가 없으면 이상한 모양새가 됩니다. 물론 밥그릇으로도 국물을 펄 수는 있지만 그건 제 역할이 아닌 셈이지요. 밥그릇을 숟가락처럼 써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손잡이, 숟가락을 쓰임새 있게 하기 위한 손잡이는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이 부분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쓰시지요.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숨겨진 보화들을 퍼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손잡이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행여 하느님 아닌 존재에게 우리를 내어 주었다가는 우리는 국물을 떠먹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을 퍼내는 데에 쓰일수도 있습니다. 숟가락의 크기는 제각각입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지요. 큰 걸로 작은 걸 펄 순 있어도 작은 티스푼을 국자처럼 쓸 수는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대부분 티스푼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우리가 처음부터 큰 숟가락이 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티스푼에서 시작해서 마음의 크기, 숟가락의 크기를 넓혀 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작은 스푼이 절대 나쁘지 않은 이유는 뭔가를 퍼내는 역할에 있어서는 미흡할 수 있지만 작은 스푼은 조금만 노력해도 쉽게 가득찰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 안의 원의가 채워지는 것이기에 그릇이 작을수록 더 쉽고 빨리 채워집니다. 공연히 그릇 크기만 키워 놓았다가 올바로 채우지 못해서 불안해하고 슬퍼하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그릇을 가득 채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적합한 그릇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숟가락은 숟가락으로 쓰십시오. 필요하다면 병따개로도 쓸 수 있지만 그러다가 목이라도 부러지면 그때는 영영 쓰임새를 잃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숟가락은 숟가락으로 쓰십시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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