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는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사실 무덤이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불꽃이었고 그들의 영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전하는 바를 따라 살아갈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즉,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차선책으로나마 하는 행동이 있으니 그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념소를 만들면 그들의 업적이 기려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유적지가 참으로 많지요. 정말 그들의 기념소를 만들고 그 곳을 거닐면 그들의 업적이 우리에게 전이되어 오는 것일까요? 과연 성지를 다녀간 그 수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오는 걸까요? 아니면 성지 관광을 다녀오는 걸까요?
우리가 예언자를 진정으로 기리고자 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엉뚱하게 그들의 삶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꾸미고 있으니 예수님은 이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미 죽은 것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진정으로 예언자를 기리는 것은 그들의 말씀은 듣고 실천하는 것이요, 진정으로 순교자를 기리는 것은 그들을 따라 우리도 세상의 어두움에 맞설 각오를 다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아름답게 꾸며진 무덤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100번을 방문해도 나의 그릇된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의미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전하는 바를 따라 살아갈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즉,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차선책으로나마 하는 행동이 있으니 그들의 무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념소를 만들면 그들의 업적이 기려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유적지가 참으로 많지요. 정말 그들의 기념소를 만들고 그 곳을 거닐면 그들의 업적이 우리에게 전이되어 오는 것일까요? 과연 성지를 다녀간 그 수많은 이들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본받아 오는 걸까요? 아니면 성지 관광을 다녀오는 걸까요?
우리가 예언자를 진정으로 기리고자 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엉뚱하게 그들의 삶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을 꾸미고 있으니 예수님은 이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루카 11,47-48)
이미 죽은 것은 죽어버린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진정으로 예언자를 기리는 것은 그들의 말씀은 듣고 실천하는 것이요, 진정으로 순교자를 기리는 것은 그들을 따라 우리도 세상의 어두움에 맞설 각오를 다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요?
아름답게 꾸며진 무덤이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100번을 방문해도 나의 그릇된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 행동은 의미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