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워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은 공공의 적이 많아져서 아주 공공연히 증오심을 드러내어도 별다른 제제를 받지 않습니다. 여러가지 일련의 사건으로 그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온갖 부정과 비리 앞에서 우리는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을 증오해야 우리편’이라는 도식은 서로에게 적용되어 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우리 편이 골을 넣어도 기뻐하지만, 상대편이 쓰러져 뼈가 부러지면 더 기뻐하는 식이지요. 적대감은 정말 무서운 것인데도 우리는 아주 공공연하게 그것을 드러냅니다.
남을 심판하는 데에서 적대감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우리의 증오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이미 우리 내면에 정해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우리의 모욕과 적의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모든 이들 앞에서 정당화되기를 바라지요. 심지어는 하느님 앞에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의 의견까지 끌어당겨 제멋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 정도면 하느님도 그를 미워하시지 않겠어?’라고 말이지요. 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죄인을 용서하러 오신 분 앞에서 남을 심판하는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의 인정을 바라니 말입니다.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그른 일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른 일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고 그의 존재는 땅 위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적대감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심판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심판은 오직 모든 것을 온전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몫이지요.
적대감을 조심하십시오. 어느 일만 생각해도 괜히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 그것을 섣불리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심각한 수준인 셈입니다. 분별과 증오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적을 증오해야 우리편’이라는 도식은 서로에게 적용되어 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우리 편이 골을 넣어도 기뻐하지만, 상대편이 쓰러져 뼈가 부러지면 더 기뻐하는 식이지요. 적대감은 정말 무서운 것인데도 우리는 아주 공공연하게 그것을 드러냅니다.
남을 심판하는 데에서 적대감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우리의 증오에 합당한 자들이라고 이미 우리 내면에 정해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우리의 모욕과 적의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동이 모든 이들 앞에서 정당화되기를 바라지요. 심지어는 하느님 앞에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의 의견까지 끌어당겨 제멋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이 정도면 하느님도 그를 미워하시지 않겠어?’라고 말이지요. 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죄인을 용서하러 오신 분 앞에서 남을 심판하는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의 인정을 바라니 말입니다.
옳은 일을 옳다고 하고, 그른 일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른 일을 했으니 죽어 마땅하고 그의 존재는 땅 위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적대감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심판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심판은 오직 모든 것을 온전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몫이지요.
적대감을 조심하십시오. 어느 일만 생각해도 괜히 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 그것을 섣불리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심각한 수준인 셈입니다. 분별과 증오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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