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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와 개인

우리 몸의 지체는 ‘나 중심’이 따로 없습니다. 모든 몸의 지체는 여지없이 몸 전체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오른손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왼발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고통’이 유발될 때에는 온 몸이 그 지체를 향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좋은 탈렌트를 보게 되면, 우리는 그 즉시 ‘나를 위한 유용성’을 떠올립니다. 그 좋은 탈렌트가 나를 위해서 어떻게 쓰여질 수 있을까를 가늠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그 탈렌트의 좋고 나쁨을 결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를 위해서 쓰일 때에는 아무리 하찮은 탈렌트라도 좋은 것이고, 반대로 그것이 나를 위해서 쓰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쓸데없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모든 탈렌트는 그 쓰임새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쓰임새는 전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발이 튼튼한 이유는 잘 걷고 달리기 위함이고, 손가락이 유연한 관절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사물들을 잘 다루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지체는 전체의 몸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손이 발톱의 페디큐어를 위해서만 봉사할리가 없고, 내 귀가 왼손의 쓰임새를 위해서만 봉사하지도 않습니다.

몸 전체의 유용성, 우리는 거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류 공동체 전체의 유용성, 그것이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류 공동체라는 몸이 걸어나가는 데에 곤란을 겪는 아픔에 하느님은 집중하십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데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나를 위해서 어떻게 쓰일지를 열심히 고민하고 그것에만 집중합니다. 내 돈, 내 가족, 내 직장… 그리고 거기에 도움되는 여러 것들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결국 나 자신의 쓰임새도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교회의 몸을 위해서 그 적합한 쓰임새가 있음에도 모든 것을 ‘나’ 위주로 해석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제 표현력이 약해서 올바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저로서는 전체를 위해서 봉사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만일 제가 제 중심으로 모든 일을 했다면 제가 이 글을 쓰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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