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이 하신 부탁입니다. 기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요. 왜냐하면 어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물고기에게 공기로 숨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을 향해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고, 그리고 하느님은 대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를 답답하게 생각하던 우리의 선조들은 ‘기도하는 법’을 다양하게 개발했습니다.
염경기도, 관상기도, 묵상기도, 예수기도, 묵주기도, 9일기도, 성무일도… 뭐 종류별로 다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골라잡으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지요. 도대체 ‘기도’란 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향해서 뭔가 주절대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하는 걸까요?
인간이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면 아마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충만히 누릴 줄 알았더라면 기도 따위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테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뭔가 아쉽고 부족하고, 그래서 영원의 갈망을 느끼는 존재이지요.
기도의 출발점은 여기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 완벽한 인간이었지만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에게 뭔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혼자서만은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감이 조금은 오시는지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영원에 맞닿으려는 인간의 갈구라고 할까요? 기도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방법적인 면에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기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물론 기도의 다양한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야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사과가 맛있고, 누군가에게는 오렌지가 맛있듯이 기도도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묵주기도가 자신을 지탱하는 좋은 수단인가 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지하게 복음을 묵상하는 기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간에 맞춰 시편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무일도가 좋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기도를 원할 때에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정말 영원에 맞닿아 있는지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종류는 둘째치고 기도의 필요 자체를 망각하고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다 심각한 근본 문제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도’라는 주제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인식하는 사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밥 먹기 전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밥을 먹으면서도 기도를 하고, 심지어는 정말 바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일하며 기도하지요.
기도하십시오. 일단은 모든 기도의 방법을 한번쯤은 체험해 볼 필요가 있을테니 이런 저런 것들을 시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도 양식이 좋다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 안에 살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지닌 우리들로서 그 생생한 현존을 되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봉헌하는 것이 ‘기도행위’인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기도는 숨쉬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이런 저런 기도의 다양한 방법들을 습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기도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공연한 말잔치를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그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 더 나은 법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을 향해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고, 그리고 하느님은 대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를 답답하게 생각하던 우리의 선조들은 ‘기도하는 법’을 다양하게 개발했습니다.
염경기도, 관상기도, 묵상기도, 예수기도, 묵주기도, 9일기도, 성무일도… 뭐 종류별로 다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골라잡으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지요. 도대체 ‘기도’란 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향해서 뭔가 주절대는 것 같긴 한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하는 걸까요?
인간이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면 아마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충만히 누릴 줄 알았더라면 기도 따위는 존재의 이유가 없을 테지요. 하지만 인간은 늘 ‘부족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뭔가 아쉽고 부족하고, 그래서 영원의 갈망을 느끼는 존재이지요.
기도의 출발점은 여기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 완벽한 인간이었지만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에게 뭔가를 말하지 않고서는 혼자서만은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감이 조금은 오시는지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영원에 맞닿으려는 인간의 갈구라고 할까요? 기도는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방법적인 면에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기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물론 기도의 다양한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래야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사과가 맛있고, 누군가에게는 오렌지가 맛있듯이 기도도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가 있게 마련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묵주기도가 자신을 지탱하는 좋은 수단인가 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진지하게 복음을 묵상하는 기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시간에 맞춰 시편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무일도가 좋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기도를 원할 때에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원하는가 아닌가를 스스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정말 영원에 맞닿아 있는지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종류는 둘째치고 기도의 필요 자체를 망각하고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다 심각한 근본 문제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도’라는 주제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인식하는 사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밥 먹기 전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밥을 먹으면서도 기도를 하고, 심지어는 정말 바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과 함께 일하며 기도하지요.
기도하십시오. 일단은 모든 기도의 방법을 한번쯤은 체험해 볼 필요가 있을테니 이런 저런 것들을 시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도 양식이 좋다고 그것을 의무적으로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 안에 살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지닌 우리들로서 그 생생한 현존을 되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봉헌하는 것이 ‘기도행위’인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기도는 숨쉬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 이런 저런 기도의 다양한 방법들을 습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기도는 양보다는 질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공연한 말잔치를 벌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그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 더 나은 법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