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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삶의 연계

어제는 교사들과 ‘하느님의 아들’(Son of God)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너무 길어서(러닝 타임 3시간) 반만 보고 나머지 반은 다음에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각종 매체를 통해서 너무나 자주 접하는 반면, 또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일어난 일을 조명할 뿐, 그것이 우리의 실제 삶에 어떤 연계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일 뿐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그 연결점을 찾는 것을 도와주더라도 엄청난 영적 보화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어제는 한 아저씨가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 유다가 어떻게 배신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대답해 주었습니다.

- 사실 유다의 배신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충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더 나은 안락을 위해서 진실함과 정의를 거부하기 시작할 때에 이미 우리는 유다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것이지요. 한 지역 반장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데 부자인 사람은 사정을 잘 보아주고, 가난한 사람은 찬밥 신세로 다룬다면 그는 이미 유다가 한 일을 하는 셈입니다. 즉 부자를 잘 보아 주면서 나중에 그에게서 좋은 것이라도 얻을 생각을 하고, 반대로 가난한 이는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자 다른 아저씨가 질문을 합니다.

- 회사에서 사장 눈치를 보면서 주일까지 일을 하면 그건 잘못된 것인가요?

- 그건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만일 그 사장이 나쁜 사장이라서 주일날에도 일을 하지 않으면 해고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권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주일에도 일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문제는 그 사장의 몫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사장에게 주일에는 쉴 필요도 있고 가족들과 함께 주일 미사도 나가야 한다고 건의를 하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상황인데도, 단지 사장의 이쁨을 받고 싶고, 주일에 나오는 수당을 놓치기 싫다는 마음으로 주일마저도 일을 한다면 그건 그렇게 결정하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결국 상황의 통제가 누구 손에 달려있는가에 따라서 그 책임이 경감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장면들은 사실 우리 삶의 장면들입니다. 다만 2000년 전의 복장을 하고 나오니 마치 고리타분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오늘날에도 배신자 유다가 있고,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가 있고, 그 밖의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치면서 간단하게 강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보아도 그때뿐 집에 돌아가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강론을 들어도 그때 잠깐 마음이 동할 뿐, 결국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합니다. 결국 선택은 여러분들의 몫인 거지요. 하지만 교리교사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아이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아이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이 없다면 아이들에게 신앙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영혼들은 여러분들의 몫이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제가 여러분들을 가르치지 않아서 여러분들이 어둠에 빠져 든다면 그건 저의 무책임함이고 불성실함입니다. 하지만 제가 충분히 가르쳤고,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했음에도 여러분들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어둠에 빠져 들기로 한다면 그건 여러분들의 탓입니다. 결국 우리는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가르치고 싶었고 그 일을 하는 중이지요. 이제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여러분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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