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너는 왼쪽으로 가거라.
- 네 왼쪽으로 말이지요? 다들 들었지? 모두 왼쪽으로 가도록 해. 저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잖아. 안그래? 왼쪽으로 가자. 모두 왼쪽으로 가는거야!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 말을 한다.
- 저기… 저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이 오른쪽인데요?
- 아니, 뭔 소리를 하는거야? ‘왼쪽’이라고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 주셨는데 왜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거야? 모두가 왼쪽이야 알겠어?
- 하지만 당신은 앞을 향해 있고, 나는 뒤를 향해 있잖소. 그러니 저에게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은 오른쪽이지요.
- 이런 이단같으니라구! 왼쪽으로 가라고 했으면 왼쪽으로 갈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무엇이든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만을 주장하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예수님부터도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정작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밀밭 사이를 거닐다가 이삭을 뜯어 먹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방향을 아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때로 지시 받은 방향을 고수하다가 서로 싸우곤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겠노라고 나서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너무나 부유하게 자신을 가꾸어 왔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난이 대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뭐든 가난하고 궁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양심껏 일하고 있는 이들마저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회는 가진 성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모조리 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의 극단적 사고는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모두 부자가 된다고 하늘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이 땅에서 어느 수준까지 오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교회 비판자가 되고 맙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향유를 부어 발을 닦는 마리아를 꾸중하시키는 커녕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 너는 왼쪽으로 가거라.
- 네 왼쪽으로 말이지요? 다들 들었지? 모두 왼쪽으로 가도록 해. 저 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잖아. 안그래? 왼쪽으로 가자. 모두 왼쪽으로 가는거야!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나 말을 한다.
- 저기… 저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이 오른쪽인데요?
- 아니, 뭔 소리를 하는거야? ‘왼쪽’이라고 구체적으로 방향을 제시해 주셨는데 왜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거야? 모두가 왼쪽이야 알겠어?
- 하지만 당신은 앞을 향해 있고, 나는 뒤를 향해 있잖소. 그러니 저에게는 그분이 가리키는 방향은 오른쪽이지요.
- 이런 이단같으니라구! 왼쪽으로 가라고 했으면 왼쪽으로 갈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무엇이든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만을 주장하면서 다양성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예수님부터도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정작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밀밭 사이를 거닐다가 이삭을 뜯어 먹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방향을 아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때로 지시 받은 방향을 고수하다가 서로 싸우곤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겠노라고 나서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너무나 부유하게 자신을 가꾸어 왔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난이 대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뭐든 가난하고 궁색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정말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양심껏 일하고 있는 이들마저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회는 가진 성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모조리 주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이들이지요.
그들의 극단적 사고는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모두 부자가 된다고 하늘나라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이 땅에서 어느 수준까지 오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돌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교회 비판자가 되고 맙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향유를 부어 발을 닦는 마리아를 꾸중하시키는 커녕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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