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마태 22,37-38)
‘사랑’이라는 통칭으로 표현하지만 분명히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전인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어야 합니다. 이 근본적인 순서는 뒤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둘째로 따라오는 것이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드문 일이긴 하지만, 하느님 없는 이웃사랑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에게서 피를 뽑아먹고 사는 악덕 사장들(좋은 분들 말고 악덕 사장들 말입니다.)은 자기 가족을 사랑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핑계가 자신의 가족을 향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스마트폰을 사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직공의 월급을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악인들도 사람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자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요.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인간적인 행동으로 뒤바꿔 버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때로는 엄청난 활동가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의 본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드높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 집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집단을 극도로 미뭐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불완전한 것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인간 사랑을 ‘거부’하고 심하게는 인간을 증오하는 경우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역사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이것도 만만치 않은 엇나간 모습입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면서 십자군 전쟁을 하고, 거룩한 재판이라면서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큼지막한 사건들이 아니라도 지금도 하느님을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하고, 하느님을 핑계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계명에는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느님을 향한 ‘진실하고 총체적인’ 사랑이고,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완결되지 않을 것이고 다만 끊임없이 배우고 커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상 사랑의 완결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해서 늘 나아가는 이들일 뿐입니다.
‘사랑’이라는 통칭으로 표현하지만 분명히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전인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어야 합니다. 이 근본적인 순서는 뒤바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둘째로 따라오는 것이 ‘이웃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드문 일이긴 하지만, 하느님 없는 이웃사랑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에게서 피를 뽑아먹고 사는 악덕 사장들(좋은 분들 말고 악덕 사장들 말입니다.)은 자기 가족을 사랑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핑계가 자신의 가족을 향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스마트폰을 사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직공의 월급을 깎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악인들도 사람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자신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요.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인간적인 행동으로 뒤바꿔 버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때로는 엄청난 활동가로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의 본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드높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 집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집단을 극도로 미뭐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들의 사랑은 불완전한 것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인간 사랑을 ‘거부’하고 심하게는 인간을 증오하는 경우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역사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이것도 만만치 않은 엇나간 모습입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면서 십자군 전쟁을 하고, 거룩한 재판이라면서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큼지막한 사건들이 아니라도 지금도 하느님을 핑계로 가정을 소홀히 하고, 하느님을 핑계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계명에는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느님을 향한 ‘진실하고 총체적인’ 사랑이고, 그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완결되지 않을 것이고 다만 끊임없이 배우고 커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상 사랑의 완결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함을 향해서 늘 나아가는 이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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