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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함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몸을 씻는 데는 비누가 필요합니다.
비누는 겉에 뭍은 때를 잘 닦아내지요.

스트레스를 날리는 데는 취미활동이 제격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게 되지요.

영혼은?
여기에서 막히게 됩니다. 우리는 몸과 정신은 챙길 줄 알아도 ‘영혼’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씻는 데에는, 영혼의 어둠을 날리는 데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최고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 역시도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찾아보지만 얻기 힘든 것이 현실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주변에 이웃들을 주셨습니다. 직접 체험하라고 말이지요. 우리는 이웃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해볼 수 있게 말이지요.

누가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이웃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웃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부족하고 서툴고 때로는 못된 마음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가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대상들이지요. 모두가 완벽하다면 우리가 일할 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굳이 나서서 ‘선을 행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가 그런 이웃들을 마주해서 살아가다보면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사랑은 주로는 Give & Take일 뿐입니다. 니가 주면 나도 주고, 내가 주면 너도 나에게 줘야하는 사랑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이유 불문하고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용서하고 내어주는 사랑이지요.

우리 주변의 부족하고 나약한 이웃들을 대하려면 하느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다보면 하느님의 은총이 내 안에 가득 차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그저 겉만 깨끗이 씻으려 했고 그런 가식적인 행위들로 스스로 의로움을 느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의로움은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들이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것들로 자선을 베풀었다면 그들은 진정한 의로운 이들, 진정으로 깨끗한 이들이 되는 셈입니다.

영혼을 씻는 최고의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맑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보고 즐길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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