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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계 안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의 기적은 하느님 당신이 마련한 자연 질서에 당신의 권능으로 개입하여 드러내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헌데, 여러분들이 기적을 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예전에는 엄청난 질환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순간에 씻은 듯이 나았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럼 그 사실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변에다 소리지를 생각이십니까? 아마도 당신더러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겠다고 여러가지 실제적인 자료들을 준비하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은 그 자료들을 조작해서 들고 온다고 의심할 것입니다. 행여 당신의 말을 마지못해 수긍한다고 합시다. 그 사실이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요?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바뀐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삶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호기심만 지닐 뿐 자신들의 삶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받게 되는 개인적인 체험들에 대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침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체험하는 그 개인적 현상들 앞에서 특별한 경우 세상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리라는 메세지가 따로 없는 이상,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체험 앞에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 일반이고 실제로 적지 않은 이들이 그런 사랑을 체험하고 침묵 가운데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위의 글을 읽고도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왜 그런 일들을 겪고서 외치지 않는거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보면 하느님을 믿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생각은 체험해 보지 않은 데에서 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특은을 입은 수많은 성인들은 감출 수 없는 그런 표지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 영광을 얻기보다 더많은 고난을 겪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제는 뒤집어서 생각해 봅시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되었노라고 고함을 지르는 이들은 십중 팔구 거짓 예언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기현상은 악마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의 행실에서 진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분별력이 없는 이들은 그저 그 외적인 형태만을 보고 달려가곤 하지요.

신앙을 기이한 현상을 통해서 얻으려는 자들은 결국 속아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보다 일상적이고 평범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고 꾸준하고 인내력이 있지요. 본당 신부의 태도가 마음에 안든다고 신자들의 생활이 마음에 안든다고 교회가 썩었다고 외치면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이들은 언뜻 그들의 주장이 옳아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기본적인 덕이 부족한 이들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오류를 수정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전히 가톨릭 교회를 사랑합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 성장했고 양분을 얻었으며 앞으로도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성찰하고 여러가지 오류들을 수정해 나갈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적을 체험한 이들의 현명한 반응은 ‘침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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