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건 거의 찰나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생각의 변화’이지요. 아무리 행복에 겨운 사람도 한 순간의 생각의 변화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불행에 젖어 있던 사람도 순간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없고 가난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거기에서도 행복을 찾으라 하는 것은 좀 엉뚱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은 회복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최저의 선을 넘어서고 나면 그 뒤부터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좌우됩니다. 군대에서 밤근무를 서고 들어와 먹는 라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가 하면 정말 부유한 사람이 매일같이 스테이크를 썰고, 최고의 한정식을 먹는 데에 길들여져 있는데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거기서 라면을 먹으라 하면 라면 그릇을 집어 던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불행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의 모든 순간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후자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군더더기를 걷어낼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사회는 우리가 그런 작업을 시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스X벅스 커피는 마셔줘야 하고, 물건을 살 때에는 X대 백화점은 가 줘야 하고, 영화도 3D 안경은 끼고 봐 줘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사람이 된 셈입니다. 즉, 세상적인 삶의 기준이 너무나 높아져서 이제 사소한 것에는 기쁨들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내면이지요. 그리고 실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면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촉매일 뿐이고 그것을 통해서 내면이 작용하는 것이지요.
갈 길이 멉니다. 배워야 할 게 많은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배움을 시작하기는 커녕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스스로 불행의 폭탄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없고 가난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거기에서도 행복을 찾으라 하는 것은 좀 엉뚱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은 회복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최저의 선을 넘어서고 나면 그 뒤부터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좌우됩니다. 군대에서 밤근무를 서고 들어와 먹는 라면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가 하면 정말 부유한 사람이 매일같이 스테이크를 썰고, 최고의 한정식을 먹는 데에 길들여져 있는데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거기서 라면을 먹으라 하면 라면 그릇을 집어 던질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불행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의 모든 순간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후자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군더더기를 걷어낼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사회는 우리가 그런 작업을 시도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까요. 적어도 스X벅스 커피는 마셔줘야 하고, 물건을 살 때에는 X대 백화점은 가 줘야 하고, 영화도 3D 안경은 끼고 봐 줘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사람이 된 셈입니다. 즉, 세상적인 삶의 기준이 너무나 높아져서 이제 사소한 것에는 기쁨들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 우리가 탐구해야 할 영역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내면이지요. 그리고 실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내면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촉매일 뿐이고 그것을 통해서 내면이 작용하는 것이지요.
갈 길이 멉니다. 배워야 할 게 많은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배움을 시작하기는 커녕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스스로 불행의 폭탄을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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