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움직이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강제적으로 속박해서 끌고 가는 수도 있고, 장시간의 세뇌를 시켜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요. 하지만 최고의 고단수는 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그 사람이 좋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속성은 ‘선’을 사랑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아주 교묘한 속임수로 선을 가장한 악을 하게 할 수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악을 선인 줄 알고 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을 컨트롤하는 방법인 셈이지요. 그리고 악마가 우리에게 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화나는 일을 만들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선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극도로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사회 현상 속에는 이러한 모습이 많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한다면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많지요.
진정한 컨트롤은 컨트롤 당하는지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일단 한 번 사로잡히고 나면 거침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그를 원하는 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되지요.
과연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진정한 선을 향한 것일까요? 아니면 선을 가장한 악이 그 안에 숨어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는 악마의 컨트롤에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비난하고 헐뜯는 것을 그냥 하면 나쁜 짓이 되지만, 죄인에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미 ‘용서’라는 개념은 물 건너간지 오래이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용서를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서 죄에 죄를 더해갑니다. 악은 저지르기 쉽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내와 인내하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술을 진탕 먹는 게 더 쉬운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잘 쉬운 길, 하지만 어둠으로 이끄는 길을 택하고 말지요.
우리의 핸들을 함부로 어둠의 영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차라리 하느님에게 맡기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에게 핸들을 맡길 때에 도리어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큰 당신의 자유를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속성은 ‘선’을 사랑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아주 교묘한 속임수로 선을 가장한 악을 하게 할 수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악을 선인 줄 알고 하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을 컨트롤하는 방법인 셈이지요. 그리고 악마가 우리에게 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화나는 일을 만들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을 선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극도로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사회 현상 속에는 이러한 모습이 많습니다. 스스로 선을 행한다면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많지요.
진정한 컨트롤은 컨트롤 당하는지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일단 한 번 사로잡히고 나면 거침이 없습니다.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그를 원하는 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되지요.
과연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진정한 선을 향한 것일까요? 아니면 선을 가장한 악이 그 안에 숨어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는 악마의 컨트롤에 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비난하고 헐뜯는 것을 그냥 하면 나쁜 짓이 되지만, 죄인에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요즈음입니다. 이미 ‘용서’라는 개념은 물 건너간지 오래이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용서를 했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도 않습니다. 그건 그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면서 죄에 죄를 더해갑니다. 악은 저지르기 쉽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내와 인내하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술을 진탕 먹는 게 더 쉬운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곧잘 쉬운 길, 하지만 어둠으로 이끄는 길을 택하고 말지요.
우리의 핸들을 함부로 어둠의 영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차라리 하느님에게 맡기십시오. 우리가 하느님에게 핸들을 맡길 때에 도리어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큰 당신의 자유를 선물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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