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5)
성경의 표현이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비슷한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나 목숨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말입니다. 하지만 그 성서적 어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고차원적인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도 우리가 조금만 묵상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두 가지 생명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지요.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 목숨이라고 표현되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은 구원받은 삶, 영원한 삶 등등으로도 표현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생명에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지상 생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요. 먹어야 산다는 표현도 그렇고 집이나 옷과 같은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육신 생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생존의 걱정에서 벗어나면 인간은 ‘정신적인 활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지요. 스트레스는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육신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활동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모든 것들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고 나면 그쳐질 것들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표현은 언뜻 마치 우리가 지상에서 완전히 동떨어져서 사막의 은수자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목숨을 향한 방향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생존만을 추구하는 그 방향성을 미워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는 충분히 봉쇄생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업을 기쁘게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사막의 은수자도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목숨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방향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모아들이고 있지요. 결국 사라져버릴 그 모든 것들을 말입니다.
성경의 표현이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비슷한 단어를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나 목숨이나 다 거기서 거기인 말입니다. 하지만 그 성서적 어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고차원적인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도 우리가 조금만 묵상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두 가지 생명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지요.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생명은 육신의 생명, 목숨이라고 표현되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은 구원받은 삶, 영원한 삶 등등으로도 표현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생명에 집중하여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지상 생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지요. 먹어야 산다는 표현도 그렇고 집이나 옷과 같은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육신 생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생존의 걱정에서 벗어나면 인간은 ‘정신적인 활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지요. 스트레스는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의 육신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활동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모든 것들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고 나면 그쳐질 것들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표현은 언뜻 마치 우리가 지상에서 완전히 동떨어져서 사막의 은수자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것은 목숨을 향한 방향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기적인 생존만을 추구하는 그 방향성을 미워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에서 특별한 소명을 받은 이는 충분히 봉쇄생활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과업을 기쁘게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사막의 은수자도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목숨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이러한 방향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모아들이고 있지요. 결국 사라져버릴 그 모든 것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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