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선과 악의 기본조차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악한 이들을 ‘선하다’고 칭송하고 많은 선한 이들을 ‘악하다’고 분별하지요.
아주 간단한 비유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사탕을 주는 이를 선하다고 하고, 힘든 일을 시키는 이를 나쁘다고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과연 사탕을 주는 모든 이가 선한 것일까요? 그리고 모든 힘든 일이 나쁜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한계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사람들을 분별합니다. 그가 나에게 뭔가 건네주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가 그것을 왜 건네 주는지를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의 내면이 과연 어떤 사람일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고 당장 눈 앞에 다가오는 것에만 관심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도 얼마든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다가오는 것들이 마냥 아름답고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때로 우리가 어둠의 세력 가운데에 유혹 당할 때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시지 않고 지켜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을 극복해야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가장한 악한 위선자들, 그리고 기피의 대상이 되는 선한 이들, 이 가운데 우리는 올바른 분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 곁의 사람은 과연 선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악한 사람일까요?
아주 간단한 비유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사탕을 주는 이를 선하다고 하고, 힘든 일을 시키는 이를 나쁘다고 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과연 사탕을 주는 모든 이가 선한 것일까요? 그리고 모든 힘든 일이 나쁜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의 한계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사람들을 분별합니다. 그가 나에게 뭔가 건네주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가 그것을 왜 건네 주는지를 파고들지 못합니다. 그의 내면이 과연 어떤 사람일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고 당장 눈 앞에 다가오는 것에만 관심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의도를 지닌 이들도 얼마든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다가오는 것들이 마냥 아름답고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때로 우리가 어둠의 세력 가운데에 유혹 당할 때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시지 않고 지켜 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을 극복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을 극복해야 우리가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가장한 악한 위선자들, 그리고 기피의 대상이 되는 선한 이들, 이 가운데 우리는 올바른 분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 곁의 사람은 과연 선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악한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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