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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의 조급함

지금의 사람들에게 신기한 일이란 자신들이 함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질 때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에 따라서 ‘우연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제 후배 신부님 한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선교사로 살면서 그렇게 차량을 가지고 일을 많이 하는데 사람이 크게 다치는 큰 사고 한 번도 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하느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그것은 ‘우연의 일치의 결과’일 뿐입니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특별히 그리스도인과 비신앙인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건을 ‘하느님의 시선’ 아래에서 바라보고 비신앙인은 저마다 자신의 합당한 이유를 찾고 밝혀내려고 애를 씁니다.

사실 비신앙인 상태에 머무르는 행정상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사건이 일어난 일의 정황을 밝히려고 들며 심지어 예수님의 시대에 일어난 일도 조목조목 그 사건의 의미를 ‘인간적으로’ 분별하려고 듭니다. 거룩한 분의 거룩한 일을 자신의 조잡한 사고 속으로 모두 몰아 넣겠다는 시도인 것이지요.

과연 누가 더 풍요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요? 당연히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즐기고, 나쁜 일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것이 좋게 작용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 느긋하고 여유롭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세상의 자녀들은 조급하고 참을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생애 안에 어떻게든 해결책이 나와야 하고 그 결과물을 본인이 스스로 맛보아야 하기에 이런 저런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이리로 저리로 몰려다니며 그 사건의 위중함을 광고하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보다 더 위중한 일을 당하고 있음에도 평온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위중한 일보다 더 위중한 일이 있어도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시리아에서 아이들이 전쟁으로 죽어나건 어쨌건, 볼리비아의 어린 아이들이 성폭력을 당하건 어쨌건 그런 일들은 자신의 삶의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고, 어떻게든 자신의 삶의 이득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일이 있으면 엄청나게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우리가 그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는 그 모든 것을 밝혀내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고, 자녀를 돌보시는 선하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온갖 풍파에도 뱃고물을 베고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이지요. 물론 제자들이 떼를 쓰면 일어나서 풍파를 잠재울 힘도 있으신 분과 더불어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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