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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22,13)

분명하게 일어나게 될 일을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귀담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모조리 내려놓게 되지요. 사람의 ‘시신’이라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시신은 그가 아닙니다. 그가 남겨놓은 마지막 허물과도 같은 것이지요. 결국 썩어 없어져 흙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신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이 남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영혼의 세계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단순히 육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가능한 만큼 우리의 영혼의 사정, 내면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것을 양식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우리가 성체를 천상의 빵이라 부르고 영혼의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냥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이 아닌 것으로 느끼는 것들, 즉 감정, 기억, 생각과 같은 것들은 모두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것, 즉 영적인 것들도 남게 되지요. 바로 온유, 절제, 인내, 사랑, 희망, 신앙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내면에 품고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안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입니다. 헌데 누군가가 오직 ‘물질적인 세상’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지요. 그가 소중히하던 외적 미모, 그가 중요시하던 은행의 돈, 그가 아끼던 옷, 재물, 집, 차량과 같은 모든 것들이 죽음의 순간 일제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에 내던져’지는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정말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일찍부터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세상 재물의 오고감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사람, 오히려 영혼에 관계된 일에 마음을 쓰고 자신의 영혼을 가꾸기를 소중히 하며 나아가 타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노력한 이는 천국에서 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진실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는 이는 정말 드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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