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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기 위한 일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5-7)

사람들은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 참으로 궁금해합니다. 하지만 선교지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 제가 어떤 선교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같이 체험하면서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그들은 저 나름의 목적으로 찾아오는 것이지요.

남미의 관광 허브로 선교지를 이용하는 이들,
남미의 싼 물가와 아직 남아있는 자연을 즐기면서 프로그램을 하려고 오는 이들,
부유한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려는 이들,
기타 등등의 개인적인 목적들...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잠깐 동안의 방문에 선교지 사람들과 동화되어 그들의 속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때로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천시하고 낮춰 보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 때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더군다나 한 번의 여행으로 마치 선교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을 바라보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8년을 살아도 아직도 모르는 일이 허다한데 잠시 방문을 한 뒤에 마치 그 나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스스로를 선교사인 양 뽐내는 이들을 보면 도대체 얼마만한 교만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을 닮아 겸손해지기 위해서 오는 곳이지 그곳의 미천한 상태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오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움직임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부유한 나라에 사는 이들은 언제까지나 자신들 안에 자리잡힌 교만한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굉장히 힘이 들거라 생각합니다.

한번은 잘 사는 다른 나라에 방문을 갔다가 거기 사는 교포신자분들의 반응을 보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안타까웠던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부자 나라에 사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려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오죽하겠습니까. 자신들도 그 나라에서 일종의 차별의 서러움을 겪으면서 말이지요.

허영은 단순히 값비싼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의 일로도 드러나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전혀 봉사의 마음이 없고 정작 자신의 부모님이 병환 중인데도 찾아 보지도 않으면서 본당에서 주임 신부님과 함께 가는 봉사활동에는 참여하려는 자매들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상급은 커녕 호된 꾸중을 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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