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이 본당의 견진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사실 솔직히 말하면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고 있는 중입니다. 수녀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굳건한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견진 받고 나면 뭔가 본당에서 봉사직을 맡아서 하라구요. 다들 견진만 받고 나면 이리 저리 떠나고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늘 있는 레파토리이지요. 첫영성체를 받고 나면 더는 성당에 나오지 않고, 견진을 받고 나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건 늘 있는 레파토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아이들이 성당을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그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면 본당을 나오지 않는지 올바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견진을 받을 만한 나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갖은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에 행복해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무엇이고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처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간단히 배고픔을 생각해 봅시다. 배가 고프면 빵을 먹으면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하자가 될 것이 없습니다. 헌데 배가 고프지 않은데 억지로 배를 고프게 만들어서 빵을 먹는 것, 또 지나치게 탐식을 해서 필요 이상의 빵을 뱃속으로 밀어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는 올바른 욕구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충족시키고 있을지 한번 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당한 경우에 우리는 불필요한 욕구를 과장해서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과연 인간에게는 그런 육적인 욕구 밖에 없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신과 관련된 욕구도 있고 보다 내밀한 영적인 욕구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아주 피상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몸을 꾸미고 싶은 욕구,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구, 인기를 얻고 싶은 욕구, 지식을 쌓아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구, 뭔가 위대한 업적을 통해 명예를 남기고 싶은 욕구,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 그러는 통에 인간이 창조된 근본 목적인 욕구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여타 동물들이 누리는 욕구 충족을 누릴 권리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특별히 당신의 상급을 나누어 받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지요. 그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인간은 이 사랑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메고 다니는 것입니다. 엉뚱한 방향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재물’ 즉 ‘돈’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그 사랑을 찾지 못하고 세상 것에 눈을 돌리다가 결국에는 ‘돈’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해 버리고 말지요. 그렇게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은 오직 세상을 자신을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소유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고 함께 교류하고 나누는 형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형제는 연합세력에 불과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라이벌이자 경쟁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모두 망가뜨리고는 외롭다고 난리 북새통을 떱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지만 모두 저마다의 식대로 사랑을 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지요. 제가 필요한 부분을 사랑하는 것이지 상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셈입니다. 그러니 지지고 볶고 싸우고 난리가 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의 총체적인 난국의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것은 ‘참 사랑’이신 하느님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외아들이신 분에게 ‘사랑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 수업은 지식으로 시작해서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지식만 배우고는 서둘러 성당을 떠나는 것이지요. 수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하고 있는 판에 졸업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뭐 잠깐 사이에 이 정도 주절댈 수 있는 걸 보니 내일 수업 준비는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내가 가진 희망을 올바로 전달해 주기만 하면 될 듯 싶네요.
“굳건한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주세요. 견진 받고 나면 뭔가 본당에서 봉사직을 맡아서 하라구요. 다들 견진만 받고 나면 이리 저리 떠나고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늘 있는 레파토리이지요. 첫영성체를 받고 나면 더는 성당에 나오지 않고, 견진을 받고 나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건 늘 있는 레파토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아이들이 성당을 나오게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그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면 본당을 나오지 않는지 올바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견진을 받을 만한 나이면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는 갖은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에 행복해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구가 무엇이고 그것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결과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처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간단히 배고픔을 생각해 봅시다. 배가 고프면 빵을 먹으면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하자가 될 것이 없습니다. 헌데 배가 고프지 않은데 억지로 배를 고프게 만들어서 빵을 먹는 것, 또 지나치게 탐식을 해서 필요 이상의 빵을 뱃속으로 밀어넣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는 올바른 욕구를 지니고 있고 그것을 충족시키고 있을지 한번 잘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당한 경우에 우리는 불필요한 욕구를 과장해서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과연 인간에게는 그런 육적인 욕구 밖에 없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신과 관련된 욕구도 있고 보다 내밀한 영적인 욕구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아주 피상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몸을 꾸미고 싶은 욕구,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구, 인기를 얻고 싶은 욕구, 지식을 쌓아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은 욕구, 뭔가 위대한 업적을 통해 명예를 남기고 싶은 욕구, 권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 그러는 통에 인간이 창조된 근본 목적인 욕구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여타 동물들이 누리는 욕구 충족을 누릴 권리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 특별히 당신의 상급을 나누어 받아 누리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즉,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지요. 그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헌데 인간은 이 사랑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메고 다니는 것입니다. 엉뚱한 방향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재물’ 즉 ‘돈’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그 사랑을 찾지 못하고 세상 것에 눈을 돌리다가 결국에는 ‘돈’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해 버리고 말지요. 그렇게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은 오직 세상을 자신을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소유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고 함께 교류하고 나누는 형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형제는 연합세력에 불과하고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라이벌이자 경쟁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모두 망가뜨리고는 외롭다고 난리 북새통을 떱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지만 모두 저마다의 식대로 사랑을 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지요. 제가 필요한 부분을 사랑하는 것이지 상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셈입니다. 그러니 지지고 볶고 싸우고 난리가 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간의 총체적인 난국의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는 것은 ‘참 사랑’이신 하느님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외아들이신 분에게 ‘사랑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인 것이지요.
그러나 이 수업은 지식으로 시작해서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지식만 배우고는 서둘러 성당을 떠나는 것이지요. 수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하고 있는 판에 졸업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뭐 잠깐 사이에 이 정도 주절댈 수 있는 걸 보니 내일 수업 준비는 특별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내가 가진 희망을 올바로 전달해 주기만 하면 될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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