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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몰라서 그 길을 걷지 않는 게 아닙니다. 걷기 싫어서 걷지 않는 거지요. 술꾼이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건강을 상한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닙니다. 그는 그걸 알고도 술이 좋고 술을 마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조금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신앙의 길을 몰라서 차선책으로 다른 방식을 선택하고 거기에 매달릴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을 맡고 있는 이들의 책임감도 존재합니다. 아예 보석을 사는 게 귀찮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 좋은 보석을 사고 싶어하는데 그것을 가리고 올바르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탓은 보석을 사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석을 광고해야 할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요. 보석을 보석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전혀 엉뚱하고 하찮은 것으로 드러낸다면 누가 과연 그 보석을 올바로 알아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때 사람들은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누가 사람들을 가르칠 사명을 지니고 있는가를 두고 왈가왈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된 질타의 대상은 교회의 교도권의 직무를 나누어 맡고 있는 이들이 되는 것이지요. 바로 주교와 사제단입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주교와 사제단은 예수님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할 직무로서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 합당한 존경과 사랑을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지요. 일하는 이는 먹을 자격이 있고 목자는 양들의 털과 젖을 먹을 자격이 있는 법입니다. 다만 그가 성심껏 올바로 일을 할 때에 말이지요.

이리가 와도 쫓지도 않고, 늘상 양들 속에 파묻혀서 그들의 털로 옷을 해 입고 젖을 짜먹으면서 여유롭고 풍요롭고 안전한 삶을 누리기만 한다면 양들은 조금씩 그 목자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상황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사제는 결국 신자들의 텃밭에서 자라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사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이 진정으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도록 도와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들을 세속적인 움직임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정말 수많은 자매들이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제들의 신앙을 보전하고 그들이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느 사제와 특별한 친분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어울리지도 않는 것들을 제시하고 건네는 것일까요?

교회의 전반적인 움직임은 사실 어느 특정 부류의 탓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신앙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고 한 마음으로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핵심입니다. 결국 우리 교회 전체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부터 서로 다투고 싸우고 있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방민족들은 그 싸우는 이를 욕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릇된 시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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