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는 성무일도를 바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살림을 돕고 일상의 기도를 바칠 의무는 존재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는 일상의 문제에서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보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다른 위치에 놓여 있고 그에 합당한 규율을 준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규율이라는 것은 울타리처럼 우리가 엇나가지 못하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아예 엇나갈 생각이 없다면 울타리도 필요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혼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기를 가르칩니다. 그러면 다른 규율들이 사실상 모두 힘을 잃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마음 깊이 가장으로 존중하고 순명하는데 거기에서 불륜을 걱정해서 이혼에 대한 법을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혼이니 불륜이니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부부의 사랑이 깨어지고 가정이 위태로워질때 드러나는 것들일 뿐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혼인에 대해서 ‘규율’이 많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엇나가기 쉽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사제생활이 쉽지 않고 신학교를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부부생활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하고 자꾸만 엇나간 길을 걸으려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규율들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에서는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기에 이런 저런 소소한 규율들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유일한 규율이 되겠지요. 그리고 모두는 그 사랑 안에 머무를 것입니다. 모쪼록 그 유일한 규율이 지금의 현세에서도 많은 가정들의 핵심 규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복잡한 여타 규율을 따져볼 이유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다 똑같은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다른 위치에 놓여 있고 그에 합당한 규율을 준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규율이라는 것은 울타리처럼 우리가 엇나가지 못하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아예 엇나갈 생각이 없다면 울타리도 필요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혼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기를 가르칩니다. 그러면 다른 규율들이 사실상 모두 힘을 잃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마음 깊이 가장으로 존중하고 순명하는데 거기에서 불륜을 걱정해서 이혼에 대한 법을 생각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혼이니 불륜이니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 부부의 사랑이 깨어지고 가정이 위태로워질때 드러나는 것들일 뿐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혼인에 대해서 ‘규율’이 많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엇나가기 쉽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사제생활이 쉽지 않고 신학교를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부부생활도 그에 못지않게 힘들고 어려운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하고 자꾸만 엇나간 길을 걸으려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규율들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하늘 나라에서는 모두가 서로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기에 이런 저런 소소한 규율들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유일한 규율이 되겠지요. 그리고 모두는 그 사랑 안에 머무를 것입니다. 모쪼록 그 유일한 규율이 지금의 현세에서도 많은 가정들의 핵심 규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복잡한 여타 규율을 따져볼 이유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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