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마태 19,21)
완전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걸까요? 무엇이 완전한 것일까요? 우리는 완전한 분을 오직 한 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세상 피조물이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한 분 완전하신 분을 닮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가장 완벽한 몸매를 가진다거나, 가장 완벽한 외모를 가진다거나 세상의 모든 학식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완전한 존재는 오직 하나,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복음의 부자 청년, 즉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 이는 다행히 ‘법’을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제정하신 소중한 법이지요. 그러나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사람, 즉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했지요.
무엇이 과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었을까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그럼 우리도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도 우리 재산을 다 팔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수도원이라도 들어가야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이 구절에서 핵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핵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 청년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느님이 시키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부자 청년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모든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본인의 의지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 법을 지키는 것마저 온전히 ‘자신의 소유’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고 그 부자청년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 존재하지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하기 싫어하는 일들입니다. 그 종류는 사람별로 다양합니다. 누구에게는 기도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든 반면, 또다른 누구에게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쉬운데 기도는 너무나 힘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사명을 주시면서 우리가 당신의 뜻 앞에 고개를 숙이는지 아닌지를 분별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마주하면 대부분 우리의 의지와 참 동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일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갓 시작해서 첫 환상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 다가오는 일들은 나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일, 그것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일이 됩니다. 아내의 설겆이를 도와주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 남편의 사소한 결함을 참아주고 그가 집에서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사제로서 신자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피고 하느님께로 이끄는 일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로 보이지만 바로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거기에 우리의 의지를 바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 걸까요? 무엇이 완전한 것일까요? 우리는 완전한 분을 오직 한 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세상 피조물이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오직 한 분 완전하신 분을 닮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인간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가장 완벽한 몸매를 가진다거나, 가장 완벽한 외모를 가진다거나 세상의 모든 학식을 이해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완전한 존재는 오직 하나,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복음의 부자 청년, 즉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 이는 다행히 ‘법’을 지킬 줄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제정하신 소중한 법이지요. 그러나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사람, 즉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했지요.
무엇이 과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었을까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그럼 우리도 모두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도 우리 재산을 다 팔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수도원이라도 들어가야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과연 이 구절에서 핵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핵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자 청년이 할 수 있는 것과 하느님이 시키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부자 청년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모든 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본인의 의지적 노력에 의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그 법을 지키는 것마저 온전히 ‘자신의 소유’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것을 간파하고 그 부자청년이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이 존재하지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하기 싫어하는 일들입니다. 그 종류는 사람별로 다양합니다. 누구에게는 기도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든 반면, 또다른 누구에게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쉬운데 기도는 너무나 힘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사명을 주시면서 우리가 당신의 뜻 앞에 고개를 숙이는지 아닌지를 분별하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일을 마주하면 대부분 우리의 의지와 참 동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일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일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갓 시작해서 첫 환상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 다가오는 일들은 나의 의지와 상반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일, 그것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일이 됩니다. 아내의 설겆이를 도와주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 남편의 사소한 결함을 참아주고 그가 집에서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사제로서 신자들을 성심성의껏 보살피고 하느님께로 이끄는 일들,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로 보이지만 바로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거기에 우리의 의지를 바칠 때에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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