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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오케스트라

평화는 마냥 입을 닫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반대로 매순간을 떠들어대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평화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열정적으로 함께 연주를 할 때에는 함께 동참해서 그 열정에 파묻히고 또 정적의 순간이 찾아오면 그 정적 속에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자신의 개인의 삶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좀처럼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이 함께 열정적으로 연주에 참여해야 할 때인지, 아니면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할 때인지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두가 조용히 머물러야 할 때에 홀로 엉뚱한 소리를 내고 있다던가 화음을 맞추어서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연주를 해야 할 때에 홀로 불협화음을을 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언뜻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타인을 파괴하려 들고, 또 자신은 침묵을 지킨다고 하면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식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귀가 음악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해서 자신이 음악 소리를 들을 의지가 없다면 말이지요. 그에게는 하느님의 연주가 전혀 들리지 않는 셈입니다. 지금이 평화의 시기인지 일을 해야 하는 시기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싸우고 다툽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히고 그들의 마음에 앙심을 남기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평화의 전사’라고 착각을 하지요.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평화와 정반대된다는 것을 스스로는 절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정의를 위해서 했다고 우겨대면서 정작 하느님의 참된 정의는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들이지요.

훗날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많은 속이는 자들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참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들이 거의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밭에 물을 주고 있는 할머니가 평화의 사도였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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