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판단하려면 적절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이 종종 스스로의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예수님보다 자신이 배우는 학문을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적 흐름 가운데 예수님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만을 뽑아내려는 부류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려면 과연 무엇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에 대한 기준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기준은 전부 세상의 학문들에서 차용하게 됩니다. 고고학, 심리학, 물리학, 역사학, 지리학... 등등에서 예수의 복음을 분석하고 그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꼽아 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일어나게 되는 문제는 다음의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곤충을 한 마리 잡아서 다리를 떼어내고 머리를 떼어내고 몸통을 떼어내서 열심히 연구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업적을 모아서 논문을 만들고 각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신이 연구한 업적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낸 부분들을 다시 열심히 조합해서 ‘이것이 곤충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곤충은 이미 죽어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학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체적인 예수님, 예수님 그대로의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이해할 때에 그의 면모를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와 ‘사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진실되이 아는 사람은 그를 ‘관찰’한 사람이기보다는 그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결국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과 사귐의 대상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시며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당신의 우정 안으로 초대하시고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에 이르게 하시니까요.
자신이 배운 학문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재단하려는 이들, 그들은 아마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친구가 된 이들만이 자신이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그분의 인격을 더욱 풍부히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과 명예에 대한 집착은 그들 스스로의 눈을 닫아 버리고 말았지요.
선교를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3시간동안 강의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실제로 선교를 하는 사람이 훨씬 나은 법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스펙’의 사회에서는 ‘선교학 학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게 할 때 일어나게 되는 문제는 다음의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곤충을 한 마리 잡아서 다리를 떼어내고 머리를 떼어내고 몸통을 떼어내서 열심히 연구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업적을 모아서 논문을 만들고 각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신이 연구한 업적을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떼어낸 부분들을 다시 열심히 조합해서 ‘이것이 곤충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곤충은 이미 죽어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학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총체적인 예수님, 예수님 그대로의 예수님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서 이해할 때에 그의 면모를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와 ‘사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진실되이 아는 사람은 그를 ‘관찰’한 사람이기보다는 그와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결국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과 사귐의 대상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시며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당신의 우정 안으로 초대하시고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에 이르게 하시니까요.
자신이 배운 학문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재단하려는 이들, 그들은 아마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과 친구가 된 이들만이 자신이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그분의 인격을 더욱 풍부히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만과 명예에 대한 집착은 그들 스스로의 눈을 닫아 버리고 말았지요.
선교를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3시간동안 강의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실제로 선교를 하는 사람이 훨씬 나은 법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스펙’의 사회에서는 ‘선교학 학위’가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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