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창 얼리어답터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을 때에 백화점을 들러서 전자제품이 많이 있는 곳에 가면 은근히 설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의 내면에 그러한 것들에 대한 욕구가 존재했고 그러한 것들을 실제로 접하고 볼 수 있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지요.
반면 백화점 1층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모를 장소였습니다. 그 많은 화장품과 구두와 지갑과 가죽 벨트는 도대체 누가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하지만 저와는 달리 그러한 곳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다가올 때에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반면 우리에게 거슬리는 것이 다가오면 소름이 끼치는 체험까지도 할 수 있지요. 특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던 이유는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본질과 구원을 품은 거룩한 여인 앞에서는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악한 의도를 마주한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고 성전의 상인들은 아예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악, 탐욕, 위선과 같은 것에 거부감을 느끼신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마주할때 진정한 기쁨을 느낄까요? 성경 말씀을 마주 대할 때, 혹은 함께 기도를 해야 할 때에, 평일미사나 주일미사에 참례할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느낌일까요? 반대로 술집에 갈 때, 쇼핑을 하러 갈 때, 재미난 영화를 보러 갈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더 선호하고 있으며 그 선호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반면 백화점 1층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모를 장소였습니다. 그 많은 화장품과 구두와 지갑과 가죽 벨트는 도대체 누가 사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하지만 저와는 달리 그러한 곳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다가올 때에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반면 우리에게 거슬리는 것이 다가오면 소름이 끼치는 체험까지도 할 수 있지요. 특히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하곤 합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가 뛰놀았던 이유는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본질과 구원을 품은 거룩한 여인 앞에서는 태중의 아기도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반면 세상의 악한 의도를 마주한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고 성전의 상인들은 아예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악, 탐욕, 위선과 같은 것에 거부감을 느끼신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마주할때 진정한 기쁨을 느낄까요? 성경 말씀을 마주 대할 때, 혹은 함께 기도를 해야 할 때에, 평일미사나 주일미사에 참례할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느낌일까요? 반대로 술집에 갈 때, 쇼핑을 하러 갈 때, 재미난 영화를 보러 갈 때에는 어떤 느낌일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더 선호하고 있으며 그 선호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본질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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