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로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 정보로 하느님을 아는 것과 실제로 하느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많은 정보를 지닌 사람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아는 데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적 교만이 참된 ‘겸손’에서 자신을 멀리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겸손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많이 아는 사람은 많은 말보다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살아보면 겸손해지는 자신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신부님들을 대상으로 이런 강론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맑은 사람은 맑고 투명한 물병과 같아서 가지고 있는 맑은 물을 그대로 드러내기만 할 뿐입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지요. 자신이 사는 삶을 직접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 안에 맑은 물이 없는 사람은 그 물병을 다른 잡다한 광고 문구들로 감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구 안에 온갖 현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자신 안에 물이 있는 것처럼 속여야 하지요. 실제로는 그 물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한 사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 많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선하다고 의롭다고 외쳐대는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선하지도 의롭지도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회의 최종 권위에 기대고 자신이 하는 말이야말로 권위가 있다고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그 내면에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구역장이 자신의 덕을 말없이 직접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이런 저런 덕이 있노라고 광고하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덕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꼴이 됩니다. 어떤 신학자가 자신이야말로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고 교황과 무척 친하고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이들은 틀려먹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틀려먹은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제발 속지 마십시오. 군중이 살리려고 애를 쓴 이는 바라빠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전에 신부님들을 대상으로 이런 강론을 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맑은 사람은 맑고 투명한 물병과 같아서 가지고 있는 맑은 물을 그대로 드러내기만 할 뿐입니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지요. 자신이 사는 삶을 직접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 안에 맑은 물이 없는 사람은 그 물병을 다른 잡다한 광고 문구들로 감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구 안에 온갖 현학적이고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자신 안에 물이 있는 것처럼 속여야 하지요. 실제로는 그 물이 없는데 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한 사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 많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선하다고 의롭다고 외쳐대는 사람일수록 실제로는 선하지도 의롭지도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회의 최종 권위에 기대고 자신이 하는 말이야말로 권위가 있다고 내세우는 사람일수록 그 내면에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는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구역장이 자신의 덕을 말없이 직접 보여주기보다 끊임없이 이런 저런 덕이 있노라고 광고하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덕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꼴이 됩니다. 어떤 신학자가 자신이야말로 진리의 열쇠를 쥐고 있고 교황과 무척 친하고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이들은 틀려먹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틀려먹은 사람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제발 속지 마십시오. 군중이 살리려고 애를 쓴 이는 바라빠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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