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강렬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일상의 십자가를 꾸준히 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기심에 넘어가서 거기에서 전하는 가르침을 듣고는 그것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전혀 엉뚱한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속아넘어간 자들이지요.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속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 ‘속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당에 오면 우리는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앞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뒷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지요. 저마다 자신이 편한 자리를 선택해서 가서 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영적으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신앙생활의 방법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례로 볼리비아에 교황님이 방문했을 때에 수많은 인파들이 교황님의 미사에 몰려 들었습니다. 본당마다 수많은 청년들이 교황님의 미사에 가기 위해서 저마다 ‘봉사자’로 나섰지요. 봉사자로 나서면 교황님 미사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봉사자들이 여전히 지금도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의 방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교황님’을 보러 간 것이지 그 교황님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러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큰 행사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이지 진정한 봉사를 실천하러 간 것이 아니었지요.
만일 지금의 교황님이 소중하다면 그것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잘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황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일상의 미사 안에서 당신의 몸을 매번 나누어주고 계십니다. 둘이나 셋 이상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굳이 어딘가 특정 장소를 찾지 않더라도 일상의 범주 안에서 얼마든지 우리의 구원자를 만나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원하는 방식’이 있고 그것을 선호하고 그것을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어떤 신심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거기서 느끼는 감동을 즐기고, 특정 그룹의 모임을 선호하고 그 그룹의 전통에 목매달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저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이 단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드러낸다!’라고 말이지요. 저 또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툴 이유가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저마다 예수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루카 9,50)
하지만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모아들이는 중일까요? 흩어버리는 중일까요? 이는 단순히 우리가 어느 종파에 속해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심지어는 자신이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엇나간 길로 접어든 종파에 속한 사람에게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하는 질문입니다. 가톨릭에 속한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종파를 따르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에서 제외되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양심에 따라 분별받게 될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다음과 같은 항목이 존재합니다.
"또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헌장16항)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속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 ‘속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당에 오면 우리는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습니다. 앞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뒷자리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지요. 저마다 자신이 편한 자리를 선택해서 가서 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영적으로도 일어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신앙생활의 방법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일례로 볼리비아에 교황님이 방문했을 때에 수많은 인파들이 교황님의 미사에 몰려 들었습니다. 본당마다 수많은 청년들이 교황님의 미사에 가기 위해서 저마다 ‘봉사자’로 나섰지요. 봉사자로 나서면 교황님 미사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봉사자들이 여전히 지금도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의 방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교황님’을 보러 간 것이지 그 교황님이 정말 소중히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러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큰 행사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이지 진정한 봉사를 실천하러 간 것이 아니었지요.
만일 지금의 교황님이 소중하다면 그것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잘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교황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일상의 미사 안에서 당신의 몸을 매번 나누어주고 계십니다. 둘이나 셋 이상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늘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고,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굳이 어딘가 특정 장소를 찾지 않더라도 일상의 범주 안에서 얼마든지 우리의 구원자를 만나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 ‘원하는 방식’이 있고 그것을 선호하고 그것을 찾아 다니는 것입니다. 어떤 신심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거기서 느끼는 감동을 즐기고, 특정 그룹의 모임을 선호하고 그 그룹의 전통에 목매달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저마다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이 단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드러낸다!’라고 말이지요. 저 또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툴 이유가 하나도 없는 셈입니다. 저마다 예수님의 뜻대로 하느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루카 9,50)
하지만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과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요? 모아들이는 중일까요? 흩어버리는 중일까요? 이는 단순히 우리가 어느 종파에 속해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가톨릭이건 개신교이건, 심지어는 자신이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로 엇나간 길로 접어든 종파에 속한 사람에게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하는 질문입니다. 가톨릭에 속한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종파를 따르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에서 제외되리라는 법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양심에 따라 분별받게 될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다음과 같은 항목이 존재합니다.
"또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하지만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헌장16항)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