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고통과 소중한 고통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결과로서의 고통은 비열한 고통입니다. 물론 그 자체의 의미(회개에로의 초대)가 존재하긴 하지만 차라리 예방할 수 있었더라면 나았을 고통이지요. 담배를 피는 사람은 자기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사람이고 훗날 기관지나 폐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분명 스스로의 탓입니다. 그때에 가서 열심히 후회한들 달라질 것은 없지요. 차라리 일찍부터 다가올 결과를 깨닫고 담배를 삼가했더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이를 험담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 험담을 흘려들을 그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고통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속이고 엉뚱한 관계를 시작했다가 그 결과물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무수한 종류의 비열한 고통들이 존재합니다.
반면, 소중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심지어는 나에게 필요한 것마저 나누어서 가난한 이들을 도울 때에 내가 느끼는 ‘불편’은 소중한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타인을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모든 이들은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하느님에게 내어 바칠 때에 하느님은 그 희생의 가치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로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개념이지요. 우리와 천상교회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만남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깊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은총의 움직임 가운데 누군가가 당하는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은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소화 데레사 성녀는 24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겪은 고통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병환 중에 그분의 내적 생활로 쌓은 모든 덕이 후대에 훌륭한 귀감이 되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있지요.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당하는 아무리 의미없어 보이는 고통일지라도 저마다 의미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성격이 모난 사람을 만나 그가 나를 괴롭힐 때,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묵묵히 참아 견딜 수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존재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는데도 그가 변하기는 커녕 도리어 나에게 비난을 가할 때에 그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은 일을 하십니다.
단순히 눈으로 드러나는 결과물만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얼마든지 더 많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다른 이를 험담하는 것을 좋아해서 그 험담을 흘려들을 그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고통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속이고 엉뚱한 관계를 시작했다가 그 결과물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무수한 종류의 비열한 고통들이 존재합니다.
반면, 소중한 고통들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심지어는 나에게 필요한 것마저 나누어서 가난한 이들을 도울 때에 내가 느끼는 ‘불편’은 소중한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타인을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모든 이들은 영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하느님에게 내어 바칠 때에 하느님은 그 희생의 가치만큼 다른 누군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로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개념이지요. 우리와 천상교회는 물리적으로 아무런 만남이 존재하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깊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은총의 움직임 가운데 누군가가 당하는 의미 없어 보이는 고통은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소화 데레사 성녀는 24세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겪은 고통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병환 중에 그분의 내적 생활로 쌓은 모든 덕이 후대에 훌륭한 귀감이 되어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있지요.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당하는 아무리 의미없어 보이는 고통일지라도 저마다 의미를 지니고 있게 마련입니다.
성격이 모난 사람을 만나 그가 나를 괴롭힐 때,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묵묵히 참아 견딜 수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의미’가 존재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는데도 그가 변하기는 커녕 도리어 나에게 비난을 가할 때에 그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은 일을 하십니다.
단순히 눈으로 드러나는 결과물만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얼마든지 더 많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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