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 관한 이 쉽고 훌륭한 비유를 두고 사실 다른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들은 그대로 실천하면 되고, 실천하기 싫으면 그 결과를 감당할 준비를 하면 됩니다. 이 비유가 전하는 메세지는 간단합니다.
‘자비를 입으려면 자비를 베풀어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다시 세속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줘서 내가 다시 그 혜택을 받는다면 결국 기브엔 테이크 아닌가? 하느님도 결국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군.’ 하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세상은 정확하게 주고 받습니다. 심지어는 덤으로 주는 것까지도 실은 모두 계산된 것이지요. 1000원을 주면 정확하게 1000원 가격, 혹은 그 이하의 가치의 무언가를 사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장사꾼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이 용서에 있어서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1000원을 내었을 때에 수천억원을 일시에 건네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하찮은 행위들로 하느님의 자비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니다. 우리는 다만 작은 성의를 보일 뿐이고 하느님은 그 작은 것을 받으시고도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뭔가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미 주시는 분이십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받아놓고도 한 푼도 내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엄청난 자비의 선물을 스스로 거절하는 꼴이 됩니다. 마음 속에 미움의 불씨가 지펴져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불꽃으로 영원히 스스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세상의 논리로 이웃을 판단했으니 우리에게도 마땅히 그 판단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자비를 입으려면 자비를 베풀어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다시 세속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줘서 내가 다시 그 혜택을 받는다면 결국 기브엔 테이크 아닌가? 하느님도 결국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군.’ 하는 생각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큰 오류입니다.
세상은 정확하게 주고 받습니다. 심지어는 덤으로 주는 것까지도 실은 모두 계산된 것이지요. 1000원을 주면 정확하게 1000원 가격, 혹은 그 이하의 가치의 무언가를 사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장사꾼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헌데 이 용서에 있어서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1000원을 내었을 때에 수천억원을 일시에 건네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하찮은 행위들로 하느님의 자비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니다. 우리는 다만 작은 성의를 보일 뿐이고 하느님은 그 작은 것을 받으시고도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우리가 뭔가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미 주시는 분이십니다. 헌데 문제는 우리의 ‘사악함’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받아놓고도 한 푼도 내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하느님의 엄청난 자비의 선물을 스스로 거절하는 꼴이 됩니다. 마음 속에 미움의 불씨가 지펴져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불꽃으로 영원히 스스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세상의 논리로 이웃을 판단했으니 우리에게도 마땅히 그 판단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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