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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마음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사람이 깨어있는 상태에서는 사물을 인지하고 반응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음식이 다가오면 먹을 수 있고 위험이 다가오면 피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잠들어 있으면 반응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들고 와도 자고 있는 아이에게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도둑이 몰래 들어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잠들어 있으면 살림을 다 털릴 수 있고,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서 ‘깨어 있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육적인 ‘깨어 있음’의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깨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깨어 길거리를 다니지만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도움이 다가와도 그것을 부여잡지 못하고, 반대로 영적인 위험이 다가와도 그것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수면 속에서 우리는 정말 엉뚱한 반응을 하기도 합니다. 어둠을 선으로 인지하고 다가서는 것이지요. 위험을 좋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아무 정보나 접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심있게 들여다보고 모든 인간적 만남을 ‘우정’이라는 핑계로 모두 이루려고 하면서 영혼은 정반대로 무너져가는 것이지요.

아마 그런 경험들 있을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하루를 일했다고 생각하고 저녁에는 친한 친구들 모임까지 갔다 왔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알지못할 공허함에 괴로워해본 경험들 말입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누군가와의 의미있는 만남 한 번이 하루를 가득히 채워본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배운 것이 많고 유익한 시간을 보낸 것이지요. 하루의 나머지 피로를 모두 없애 줄 정도로 충만한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열매가 온전히 익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열매가 너무 썩어 온갖 독충을 끌어들이고 다른 열매들에 필요 이상으로 해악을 끼칠 때도 주님은 그 열매를 따서 내버리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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