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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8장 강의록

올리브산
올리브산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피정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제자들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친 영을 바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올리브 산이 필요할 것입니다. 단순히 영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간음한 여자
예수님께서 내려오자마자 마치 준비한 듯이 판이 짜여져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합심해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율법의 준엄한 명령을 핑계로 여인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은 전에 없던 엉뚱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십니다. 즉, 몸을 굽혀서 땅에 뭔가를 쓰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켜야 했지요.

흥분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엉뚱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빨리빨리 진행할 때에 우리는 곧잘 중심 생각을 잃어버리고 눈 앞의 현실에 급급해지게 됩니다. 운전에 열중하는 사람이 ‘거룩한 것’을 묵상할 리가 없습니다. 그는 눈 앞에 빠르게 오가는 자동차들을 주시하느라 자신의 열정을 다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 영원한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적’이 필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미사 사이사이에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살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늘 바쁘다고 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내면이 텅 비어 있다고 외쳐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여유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흥분한 군중을 진정 시킵니다. 군중들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자 예수님은 몸을 일으키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소위 그들이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가져온 자신들의 추악한 의도를 다시 그들에게 돌려 주십니다. 즉 그들은 이 추악한 선택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들어가기를 바랬으나 예수님은 ‘조건’ 하나를 붙여서 다시 그들에게 돌려주신 셈이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갖게 같은 행동을 취하십니다. 즉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언가를 쓰시지요. (알 도리는 없지만 저는 ‘서로 사랑해라.’를 여러번 반복해서 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입니다.)

이제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납니다. ‘나이 많은 자들’, 즉 그나마 삶의 지혜가 있는 이들부터 자리를 뜨기 시작하지요. 그렇게 군중은 점점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군중의 특성은 그러합니다. 흥분해서 소리치고 뭔가 힘을 일으키지만 결국 흩어 놓으면 제각각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들이지요. 허망하고 먼지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군중’ 속에 있을 때에는 조심해야 합니다.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뭔가를 전복하기 위해 애쓰지만 때로는 ‘왜?’라는 의문도 없이 그렇게 합니다. 그저 단순히 지금 우리가 달리는 것이 ‘옳다’고 다른 이들이 달리는 걸 보고 믿을 뿐이지요. 광장에서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비둘기떼 가운데에서 날아야 할 이유를 아는 놈은 제일 먼저 나는 놈 뿐입니다. 나머지는 덩달아 따라 날아오르지요. 그리고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여인 만이 남습니다. 그 여인을 단죄하던 자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오직 ‘죄 없는 분’이신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이지요.

세상의 빛
우리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지요. 태양에서 나와 만물을 비추고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여 멀쩡히 걸어다닐 수 있게 만드는 빛입니다. 우리의 주님 또한 빛이십니다. 하지만 이 빛은 단순히 우리의 눈을 밝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영을 밝혀주어 우리가 다른 차원의 어둠, 즉 죄악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고 영적 사정을 분간하여 위험 없이, 즉 유혹에 빠지는 일 없이 걸어다니게 만들어 줍니다.

자신에 관한 증언
우리가 늘 증언을 할 때에 제3자를 찾는 이유는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3자의 객관적인 시선은 통상적으로 진실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증언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큼 진실하신 분은 다시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말이나 사건의 진실성을 파악하기 위함인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은 오직 예수님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일 뿐입니다. 다른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들이지요. 예수님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던 분이셨기에 그분의 증언은 유효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이런 저런 일들을 판단하고 심판하려 듭니다. 자신의 욕구에 따라 원하는 것을 취하려니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에게 맡기셨고 당신의 개인적인 욕구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심판
심판은 심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이가 어른 재산분쟁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는 그런 사정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다른 형제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의 내면에 실제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오직 하느님만이 그리고 그분이 합당하게 자격을 맡기시는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이 올바로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은 심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 있느냐?
사람들은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외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출신의 동네 사람으로만 그를 인식할 뿐 그의 내면에 쏟아부어진 성령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내면에 ‘증오’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의 구절들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나는 간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뒤에 한동안 하늘만 쳐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간다’는 것으로 통해서 바로 ‘공간’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간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신 셈입니다. 마치 개미들이 종이 위에서 오손도손 모여 있는데 위에서 손가락을 갖다대면 이 손가락이 마치 전에 결코 없던 것이 자신들의 세상에 나타난 것인양 놀라 허겁지겁 도망가는 것처럼 예수님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신 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올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올 수 없다
자신의 죄 속에서 죽을 운명을 지닌 자들, 즉, 스스로의 선택으로 눈멀기를 선택한 자들은 이미 그분이 진정으로 의도하시는 것, 진정으로 우리들을 이끌고 가실 곳에 대한 일말의 개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증오’를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사랑’의 하느님에게 속한 분이시지요. 증오하는 자들은 모두 살인자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지금 당장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저 ‘증오’를 마음에 품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증오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면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사랑의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에서 이를 읽어내셨고 그들의 운명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정해진 운명은 언제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합당하게 따르려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증오를 종식시키고 사랑을 열기 시작하게 되어 우리의 삶을 180도 뒤바꿔 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를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믿는 바를 선포하고 전하게 되지요. 그렇게 스스로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가리워진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홀로만 품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이름이 널리 퍼지는 진정한 믿음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수님은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그분과 함께 머무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자녀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 걸음을 모두 지켜보시고 바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보살핌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선인에게는 더 똑바로 힘있게 걸어가게 가르치시고 악인에게는 그 걸어가는 길에서 돌이키도록 가르치실 뿐이지요.

진리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자들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말 다리에 줄을 묶어 놓으면 그 말은 자신이 달리지 못하는 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말에게 자신이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시키고 나면 원래대로 달리게 되겠지요.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죄에 묶여 있던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풀어헤쳐 영원을 향해 달리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죄의 종
죄를 짓는 자들은 죄의 종이 됩니다. 어둠을 범하는 자들은 그 어둠에 종속되게 됩니다. 반면 진리를 실천하는 자들은 그 진리로 인해 더욱 자유롭게 되지요. 죄를 짓는 자들은 사랑하기를 힘들어합니다. 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지요. 과연 자유라는 것이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죄인들도 얼마든지 자유를 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스스로는 더욱 자유롭다고 생각하겠지요. 마음껏 욕설하고 비방하고 증오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는 동안 더욱 더 참된 행복에서 멀어져 가는 셈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그러한 어두움들이 다시 자신들에게 되돌아와서 공격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요. 참된 자유는 본인의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이고 선을 행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우리는 악을 저지르기 위해서 태어난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입니다.

종과 아들
결정적으로 종과 아들을 구분짓는 것은 집에서의 행태입니다. 종은 임시적이고 계약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반면 아들은 ‘사랑’으로 맺어져 있지요. 악인들에게 허락되는 모든 것들은 임시적으로 계약으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일해서 벌어서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지탱해 나가야 하지요. 하지만 아들들의 기쁨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내면에서 샘솟는 기쁨을 만끽하고 그 기쁨의 원천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종의 아들은 좋은 주인에 의해 보살핌을 받지만 ‘유산’을 받지는 못합니다. 반면 아들들은 가득한 사랑을 받고 더불어 유산도 받지요. 하느님의 유산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들
여기서는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요한 8,44) 하느님의 자녀들의 상대편에 맞서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바로 악마를 아버지로 둔 악마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도 알아들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의 본성이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아무리 엄마가 좋은 뜻으로 다가가도 엄마를 두려워하듯이 거짓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은 진리를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보면 증오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짓의 자식이고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계속되는 언쟁

그들은 예수님을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진리의 편에 서 있고 그들은 거짓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허망하게 계속 언쟁을 시도하지만 예수님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행여 한 명이라도 진리를 깨닫고 돌아올 자를 위해서 끊임없이 그들의 피곤한 언쟁에 답변을 해 주시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예수님은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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